“니가 해라, 독수공방”...피범벅된 수컷들의 싸움 [수요동물원]

정지섭 기자 2024. 2. 2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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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 기각류 코끼리물범의 ‘승자독식’ 짝짓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평생 ‘수컷해변’서 독수공방해야 할수도
”폭력과 음란함으로 물든 연례행사”라는 비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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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 천지가 흔들리는 듯 합니다. 지축이 요동치는 듯 합니다. 규칙적인 굉음이 일어날 때마다 넘실대던 파도가 공중으로 치솟을 듯 합니다. 잦아드려나 싶을 즈음 다시 ‘쿵’하는 굉음이 따라옵니다. 쓰나미의 불길한 전조일까요? 굉음이 들려오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레예스 곶 바닷가로 가봅니다. 두 괴수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몸길이는 6m에 육박하고, 몸무게는 2000㎏를 넘는 괴수 둘이서 서로를 마주보고 돌진합니다. 자칫 깔렸다가는 바로 뼈가 으스러져 가루가 될 것처럼 보이는 가공할 몸집입니다. 그 몸집 자체가 무기입니다.

캘리포니아 레이에스 해변에서 번식철 수컷 코끼리물범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Point Reyes National Seashore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칩니다. 충돌로 인해 까끌까끌하던 놈들의 거죽이 벗겨지면서 몸뚱아리가 핏빛으로 물들었어요. 잔뜩 발그레하게 부풀어오른 코를 앞세우고 두 괴수는 죽을 듯 상대방을 향해 돌진합니다. 자신에게 가해질 충격은 아랑곳않겠다는 태세입니다. 이 괴수는 지구상 최대의 물범인 코끼리물범의 수컷입니다. 이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몸뚱이가 피범벅이 되도록 싸워대는 걸까요? 한정된 기간에만 허락된 수컷의 숙명이자 멍에인 흘레를 위해 이토록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물범·물개·해마를 아우르는 기각류는 뭇 인간들에게 스태미너의 화신으로 각인되어있습니다. 그건 번식철이 되면 수컷 한마리가 여러마리의 암컷들을 상대하는 방식의 흘레붙기 장면 때문이기도 해요. 이 극강의 번식법의 최정점에 지상 최대의 기각류 코끼리물범이 있습니다. 암컷을 두고 여러 수컷이 힘과 기량을 다투는 서사는 젖먹이짐승에서는 일반적입니다. 느물거리는 바람기 센 남성에 종종 비유되는 늑대가 알고보면 일부일처를 철저하게 지키는 ‘인간적 연애’를 하는 반전이 있을 정도예요. 초식동물 중에서는 소의 무리가, 육식동물 중에서는 기각류가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암컷을 상대하는 이른바 ‘하렘 스타일’을 이어갑니다. 그 하렘 중에서도 가장 하드코어가 바로 코끼리물범입니다.

번식철이 되면 코가 부풀어오르는 코끼리물범./National Park Service Photo

‘1대50′. 번식철 흘레붙는 수컷과 암컷의 평균적 비중입니다. 극여초사회인걸까요? 아닙니다. 대개의 젖먹이짐승들의 그렇듯 암수 비율은 자연적으로 1대1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가혹하고 처절한 승자독식입니다. 이 상황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아바의 명곡 ‘The Winner Takes It All’입니다. 육체적 본능에 이끌려 수십마리의 암컷과 수십마리의 수컷이 해변에 도착하지만, 수컷 중 가장 힘세고 쌈박질 잘하는 단 한마리만이 몸뚱이를 부둥키고 자신의 유전자를 흩뿌릴 수가 있습니다. 그 타이틀을 위해 박터지도록 싸우는 겁니다.

번식철을 맞아 코가 부풀어오른 수컷 코끼리물범이 포효하고 있다./NPS / A. Kopshever

이 수컷코끼리물범의 혈투를 담은 생생한 동영상이 포착돼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산하 레예스곶 국립해안 공원관리소 페이스북 계정에 최근 올라온 거예요. 불과 10여초에 불과한 동영상이지만, 모니터를 뚫고 강렬한 모래바람을 타고 날아온 피비린내가 코를 찌를듯해요. 두건처럼 머리를 덮고 있는 괴상한 코는 번식철이면 불끈 달아오르는 수컷의 상징입니다. 그 두건을 머리에 인 두 괴수의 팽팽했던 균형은 이윽고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엇비슷한 덩치를 가졌던 두 괴수였지만, 한놈이 점차 균형을 잃으면서 바닷가로 밀려납니다.

번식철을 맞은 수컷코끼리들이 암컷들을 차지하기 위한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NPS / Marjorie Cox

이 싸움의 승자와 패자가 마주하게 될 풍경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최후의 승자가 된 놈은 의기양양하게 암컷들이 몸을 부둥키고 있는 구역으로 뒤집힌 눈을 꿈벅이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갈 것입니다. 그 이후의 풍경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차마 글로 적을 수가 없습니다. 짐승들의 본능적 몸짓을 인간에 사랑과 연애의 감정에 빗대는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왜 패륜과 막장을 짐승에 빗대는지 그 광경이 보여줍니다. 번식철 코끼리물범의 무리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생생히 묘사한 LA타임스 1988년 4월 24일자 기사에서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스대학 소속 생물학자 버니 르 뵈프는 번식철 수컷코끼리물범의 행각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진의 몸의 절반밖에 안되는 암컷을 향해 돌진하는 수컷 코끼리물범.NPS / Marjorie Cox

“수컷의 횟수가 하루에 열 번 꼴입니다.(males will mate about 10 times a day) 놈들은 어디든 달려들었어요. 임신한 암컷, 죽은 암컷의 사체, 같은 수컷, 심지어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새끼들에게까지요.(They will try to mate anything--dead or pregnant females, other males, even pups) 그것은 섹스와 폭력으로 얼룩진 캘리포니아 해변의 연례 행사입니다.(It’s an annual ritual of sex and violence on the coast of California)” 욕망에 눈에 뒤집혀 광기어린 몸뚱이를 앞세운 승자에 밀린 패자의 행로는 어떨까요? 최후의 승자에게 진 토너먼트 패자들이 몰려있는 한적한 바닷가입니다. 이 뜨거운 번식의 계절에 패배자의 멍에를 쓰고, 독수공방을 하게 된 수컷들이 몰려들어있는 이 바닷가를 인간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총각해변(bachelor beach)’.

암컷 코끼리물범이 낳은 새끼를 돌보고 있다./Point Reyes National Seashore Facebook

총각해변의 주인들은 이곳에서 한철을 보내고 쓸쓸히 바닷가로 돌아갈 것입니다. ‘내 다시는 이 해변에 오지 않으리’라고 이를 악물테죠. 그리고 일부는 독하게 와신상담해서 내년에 한방 인생역전을 노릴 것입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절대다수는 다시 그 해변에서 독수공방해야할 신세입니다. 싸우면서 울부짖는 수컷들은 아마 이렇게 처절하게 외치고 있을 겁니다. “나는 못한다. 니(네)가 해라, 독수공방!” 이 처절하고 철저한 승자독식체계에서 탈독수공방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승자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냅다 몸을 들이밀어 도둑흘레붙는 거죠. 하지만, 자칫 뼈도 못추리고 그자리에서 혼이 달아날 각오까지 해야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승자독식제로 가다보니 수컷코끼리물범 열마리 중 여덟마리는 평생 총각해변에서 번식시즌을 보내다 삶을 마감한다는 통계까지 언급될 정도입니다.

윤리와 도덕, 연애, 설렘... 그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찾을 수 없는 코끼리물범의 냉정한 번식서사는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라도 가장 생존력 강한 놈들의 유전자로 대를 잇는다는 가혹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새끼가 태어납니다. 여느 짐승들이 그렇듯 갓 태어난 새끼물범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하고 앙증맞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새끼들의 절반은 욕망과 본능에 날뛰는 괴수로 성장해갈 것입니다. 그 괴수의 극소수가 제왕에 등극해 본능을 발산하느라 날뛰는 사이 절대다수는 또 평생 총각해변에서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잔혹하고 안타깝고 소름끼치는, 이것이 자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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