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마법은 없다 [책이 된 웹소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김상훈 기자 2024. 2. 2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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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마법이 일어나도 쉽지 않은
나 아닌 너를 이해하는 일
상대방을 이해하는 건 마법을 부리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역지사지易地思之.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라는 말은 오랜 금언金言이지만 현실에서 실천하는 건 쉽지 않다. 이 순간에도 같은 공간에서 살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깎아내릴 의도 없이 무심코 뱉은 말이 누군가에겐 마음을 긁는 칼이 되기도 한다.

상대를 이해하고 싶다는 희망은 오래된 테마인 만큼 이를 다룬 작품도 많다. 마법이나 초자연현상이 등장하는 창작물은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려 한다. 마음을 읽는다거나 몸이 뒤바뀐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보라 작가의 웹소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도 두 주인공의 몸이 뒤바뀌는 사건이 펼쳐진다. 다만, 마법으로도 상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존 틀과 다르다.

주인공 바이올렛 로렌스는 왕가의 공주다. 소설은 바이올렛의 결혼식으로 시작한다. 왕가는 국책사업에 실패하며 막대한 빚을 졌다. 평민 사업가인 윈터 블루밍은 전 재산을 들여 정부 빚을 탕감해주기로 한다. 비록 금전에 의해 이뤄진 결혼이지만 바이올렛은 윈터에게 첫눈에 반해 행복한 삶을 꿈꾼다.

축복으로 가득해야 할 결혼식은 왕위 계승자이자 오빠인 에쉬의 선언으로 엉망이 된다. 에쉬가 왕실 해체와 의회로의 권한 이임을 발표한 거다. 윈터는 재산을 잃고 작위조차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신랑이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피로연장을 빠져나가면서 새 신부인 바이올렛의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덧칠된다.

총기 있고 고결한 공주님은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남편인 윈터는 바이올렛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일조차 없이 자신의 사업에 몰두할 뿐이다. 홀로 남은 바이올렛은 3년에 걸쳐 천천히 썩어간다. 따돌림 끝에 망가진 바이올렛은 목숨을 끊기 위해 수면제를 과다복용한다.

바이올렛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윈터와 몸이 바뀌어 있었다. 낙관적인 작품이라면 서로의 관계는 극적으로 개선될 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몸이 바뀌는 '사소한' 사건쯤으론 부족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처지를 조금 더 알게 됐지만 그뿐이었다. 바이올렛의 생활을 더 낫게 해줄 수 있지만 그녀가 겪었던 좌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윈터는 마침내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늦기 전에 잠깐만, 한 번만이라도 나 좀 봐주지. 한 번이라도 내 편이 되어 주었다면. 나는 아직도 당신을 떠날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중

[일러스트 | 카카오페이지 제공]

작품은 바이올렛에 중점이 맞춰져 있지만 바이올렛 또한 윈터라는 인간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길러진 윈터에게 사랑이란 돈과 같은 의미였을 뿐이었다.

결혼식 자리를 황급히 떠난 건 돈이 없어진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기 위함이었다. 작품이 전개되며 바이올렛은 윈터가 그랬듯 자신 또한 윈터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몸이 바뀌는 사건이 '극적 반전'이 아닌 '계기'를 마련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점은 꽤 매력적이다. 작품은 몸이 바뀌며 벌어지는 사건보다 그 직후 바이올렛과 윈터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고민과 감정 묘사에서 빛을 발한다.

여러 사건 끝에 두 사람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면서 마침내는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결국 상대를 이해하는 궁극의 방법은 몸이 바뀌는 마법이 아니라, 상대를 보고,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거다.

김상훈 문학전문기자
ksh@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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