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의문사 사흘 전, 우크라 망명 러 조종사도 피살

파리/정철환 기자 2024. 2. 20.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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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헬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가 기자회견을 하던 모습/우크라이나 프라우다 홈페이지

지난해 8월 자신의 헬리콥터를 몰고 우크라이나로 망명해 우크라이나 영웅으로 떠올랐던 러시아군 헬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29)가 지난 13일 스페인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고 19일 현지 매체들이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 16일 옥중 급사한 것이 알려진 데 이어, 불과 사흘 만에 또 다른 반(反)푸틴·반러시아 인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현지 경찰이 사건에 대한 수사에 본격 착수한 가운데, 그의 죽음에 러시아 당국이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 대통령이나 러시아 정부를 비판했다가 돌연 목숨을 잃은 사람은 50여 명에 달한다.

쿠즈미노프의 시신은 스페인 남동부 알리칸테 인근 휴양도시 빌라호요사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12발의 총탄을 맞고 숨진 그를 전 여자 친구가 발견해 신고했다”며 “총에 난사당한 뒤 (살해범의) 차에 치였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약 20㎞ 떨어진 엘캄펠로 마을 근처에서는 살인범들이 도주에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이 불에 탄 채 발견됐다. 사망 당시 그는 가명으로 된 우크라이나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일간 엘문도 등은 “위장된 신분으로 은신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은 처음 이 사건을 갱단 간의 총격전으로 여겼다가, 피해자의 진짜 신분을 뒤늦게 알고 수사 방향을 바꿨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는 “쿠즈미노프는 최근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이후 (러시아에 살던) 자신의 전 여자 친구를 불러들였다”고 보도했다. 그가 스페인으로 이주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보 당국은 이 과정에서 그의 소재가 러시아 정보 당국에 노출돼 암살됐을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망명 직후인 지난해 9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반역자’로 규정됐다. 영국 대중지 선은 당시 “쿠즈미노프의 ‘배신’에 푸틴이 격분했다”며 “특수부대 장교들이 국영 TV에 나와 ‘쿠즈미노프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쿠즈미노프는 우크라이나 국방정보국이 ‘신니차(박새)’라고 명명한 비밀 프로젝트에 의해 망명했다. 그는 본래 러시아 육군항공대 제319독립헬리콥터연대 소속 대위로, 자신의 헬기(Mi-8)를 이용해 러시아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수호이-27과 수호이-30 전투기 부품을 나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측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모두 탈출시키고 우크라이나 혹은 제3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결국 8월 9일 평소처럼 헬기에 수호이 전투기 부품을 잔뜩 싣고 이동 중 우크라이나 쪽으로 기수를 돌려 착륙했다. 당시 그의 헬기에는 승무원 2명이 타고 있었으나, 동반 망명을 거부하고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우크라이나 도착 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불의한 전쟁에 회의감을 느꼈다”며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러시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량 학살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러시아군 보급망에 대한 정보를 유출, 러시아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가 공언했던 ‘대반격 작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해 초조해하던 우크라이나 정부에 쿠즈미노프의 망명은 국민 여론을 환기시키고 군에 사기를 불어넣어 주는 호재로 활용됐다. 그가 출연하는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방영했을 정도다. 쿠즈미노프는 1848만 흐리우냐(약 7억원)의 보상금도 받았다. 이런 일련의 장면은 1983년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북한에서 귀순한 뒤 한국 공군 장교가 된 고(故) 이웅평 대령의 탈북 과정과 빼닮았다. 이 대령 역시 귀순 직후 한국에서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쿠즈니노프 살해의 구체적인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러시아 공세에 고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큰 악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쿠즈미노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신변 보호가 충분치 못했다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쿠즈미노프가 과거 러시아군 동료와 사망한 헬기 동승자들의 가족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러시아 사법 당국은 그를 사망한 승무원 2명에 대한 살해 혐의로 기소한 상태였다. 경찰은 용의자나 살인 동기에 대한 실마리가 부족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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