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죽음
윤석열 대통령은, 평화라는 말을 자주 쓴다. 나름의 평화관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평화론자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그의 평화 앞에는 ‘힘에 의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상대의 위협에 굴복해 주어지는 평화는 가짜 평화’라고 한다. 문제는 그런 평화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같은 이들도 추구한다는 데 있다. 내가 강한 무기를 갖추면, 상대는 더 강한 무기로 응수함으로써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런 평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많은 자원을 전쟁 대비에 써야 하고, 그렇게 해도 공멸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최근 우리는 그 평화관이 국가 간 관계에서 적용되는 것만은 아님을 확인했다. 대학 졸업식장에서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학생을 대통령 경호관들이 물리력으로 제압한 데서도 나타났다. 주최 측은 한 사람의 입을 막고 그 자리에서 들어냄으로써 행사장의 평화가 지켜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물론 그 장면을 지켜본 많은 시민들은 고통, 두려움을 느꼈다. 그 자체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행사한 폭력이었다. 물론 그런 사정은 휴전선 이북에서는 더할 것이다.
지난 17일 93세로 타계한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에서 평화를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구분했다. 소극적 평화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적극적 평화는 물리적 폭력의 원인이 되는 차별·빈곤 같은 구조적이거나 문화적인 폭력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두 평화는 서로 연결돼 있다. 국가 간 평화와 국내 평화도 서로 연결돼 있다. 갈퉁은 평화는 어떠한 갈등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이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화론을 새긴다면, 이땅의 평화를 바라는 시민들이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있다. 상대방과의 이견을 토론을 통해 조정하는 것,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 때에도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것, 차별·빈곤과 같은 구조적·문화적 폭력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을 국가 권력에도 요구해야 한다. 가장 평화롭지 않은 시절에 눈을 감은 갈퉁의 평화를 빈다. 손제민 논설위원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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