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 혹은 '숲으로' 돌아가다[어도락가(語道樂家)의 말구경]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황당하게 틀린 맞춤법 모음이라고 널리 퍼진 사례가 있다. ‘소 잃고 뇌 약간 고친다’처럼 일부러 웃기려고 만든 느낌이 크게 드는 것부터 ‘권투를 빈다’처럼 까딱하면 틀릴 만한 것까지 골고루 있는데 ‘수포로 돌아가다’를 ‘숲으로 돌아가다’로 쓴 것은 장난인지 아닌지 좀 아리송하다. 맨 처음 언급한 언론은 <말이 안 되는 우리 국어실력>이라는 2008년 7월 3일 조선일보 기사다. 인터넷에서 주기적으로 도는 황당 맞춤법 오류 사례 모음집은 나중에 만들어진 듯하다.
그럼 그 기사는 기자가 꾸며냈을까? 꼭 그렇진 않을 것이다. 2004년부터 네이버 블로그와 다음 카페에서 확인되고 이후에도 딱히 장난스럽지 않은 글투로 블로그나 카페에서 ‘숲으로’가 왕왕 보이는 걸로 미루어 누군가는 틀릴 법도 하다. 수포(水泡)가 ‘물거품’을 뜻하고 덧없음과 헛됨을 빗댄다는 걸 모르면서 넘겨짚기만 잘한다면, 오히려 ‘숲으로 돌아가다’가 산속으로 몸을 피하거나 승려가 된다는 뜻의 ‘산으로 들어가다’처럼 보여 일이 틀어지는 비유로도 어울린다고 느낄 만하다.
그런데 ‘숲으로 가다’가 ‘실패하다/망하다’인 언어들이 있다. 바로 스웨덴어(gå åt skogen), 핀란드어(mennä metsään), 에스토니아어(metsa minema)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숲이 국토 면적의 약 70%로 유럽에서 가장 넓고 에스토니아도 거의 절반을 차지해서 저런 숙어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야기나 일이 뜻한 대로 안 굴러감을 일컫는 ‘산으로 가다’도 산이 많은 한국다운 표현일 수 있겠다.
다만 숲의 면적이 넓은 축에 드는 나라의 언어인 슬로베니아어, 라트비아어는 그런 표현이 없으니 지리와 언어의 관련성을 꼭 억지로 묶을 필요는 없다. 몸이 아프거나 기운이 없다는 뜻의 아이슬란드어 ganga ekki heill til skógar(숲으로 멀쩡히 걸어가지 못하다)는 숲이 드문 아이슬란드에서 숲까지 가려면 한참 걸릴 테니 생긴 표현인가 싶었는데, 나무 베러 숲까지 못 갈 만큼 허약하다는 게 유래다. 아이슬란드는 나무가 자라기에 혹독한 자연환경에다가 초기 주민 정착 이후로 이어진 벌목 탓에 숲이 더욱 줄었다.
이탈리아어 andare a monte(산으로 가다)는 ‘수포로 돌아가다’의 어감이다. 이탈리아는 고산지대가 넓은 축은 아니고, 알프스 산악 지대의 독일어, 슬로베니아어, 프랑스어 등에도 그런 표현은 없다. 핀란드어는 ‘숲으로 가다(실패하다)’와 뜻이 같은 mennä päin mäntyä(소나무로 가다)도 있는데 핀란드 숲에서 가장 많은 게 소나무라서 숲으로 가나 소나무로 가나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 아직 없는 ‘산으로 가다’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에서 유래해 2000년대에 나온 표현이다. ‘물거품/수포로 돌아가다’처럼 이 속담도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말고는 표현이 똑같은 언어가 드물다. 영어는 too many cooks spoil the broth/soup(요리사가 너무 많으면 국물/수프를 망친다), 독일어는 viele Köche verderben den Brei(요리사가 많으면 죽을 망친다)라 하고 여러 유럽 언어에서 비슷하게 표현한다.
인간이 자연을 망가뜨린다면 강제로 자연인이 되어 국물도 없는 수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미래를 ‘산으로 가다’와 ‘숲으로 가다’라는 표현이 예지몽처럼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죽상 지을 일은 아니고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는 속담처럼 우리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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