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된 형들…85살 막냇동생은 눈물만 흘렸다
먼 길을 돌아서 왔다. 20일 오후 제주에는 비가 내렸다.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인천과 김포를 거쳐 제주에 이르는 먼 길을 오는 내내 형언할 수 없는 기억이 뒤엉켰다. 재미교포 이한진(85)씨가 75년 만에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보다는 회한으로 가득 찼다. 빗속에서 80대 중반의 이씨는 안경 너머로 번지는 물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씨는 이날 오후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 주최로 열린 ‘4·3희생자 신원확인 보고회’에 부인, 아들딸, 손녀와 함께 참석했다. 10여년 전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형의 신원이 확인돼 형을 만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먼 길을 찾아왔다.
이씨의 고향은 제주시 화북1동 벌랑마을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상선을 운영해 비교적 풍요롭게 살았다. 해방되자 일본에서 상선을 운영했던 큰형(이한빈)과 만주에서 생활하던 둘째 형(이한성)이 귀향했다. 아버지가 4·3 이전에 숨져, 시집간 큰누나를 제외하고 어머니와 큰형, 둘째 형, 큰누나, 작은누나, 여동생 등 6남매가 살았다. 4·3 당시 어머니와 작은누나가 희생됐고, 두 형은 행방불명됐다. 집안은 사실상 절멸 상태에 이르렀다.
이날 이씨는 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둘째 형은 넓은 집 마당에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애국가를 가르쳤다. 이씨도 어릴 때 형을 따라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게 신이 났다고 한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4·3의 도화선이다. 당시 둘째 형은 기념대회에 동네 청년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씨는 “한성이 형님이 동네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를 그려서 머리에 두르고 대나무로 현수막을 만들어 관덕정에서 열린 3·1행사에 참가한 게 기억난다”며 “형님이 한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 일 뒤 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4·3이 터졌다. 1948년 어느 추운 겨울 아침, 어머니와 작은 누나, 동생과 안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급하게 불렀다. 둘째 형이 동네 청년들을 학살하는 바닷가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민가로 숨어들었다. 총알이 비껴가는 바람에 다행히 살아나 몸을 피했으나, 그때부터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의 끊임없는 시달림이 계속됐다.
어머니는 서북청년단의 눈을 피해 남아있는 자녀들을 데리고 낮에는 인근 마을로 피신했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해야 했다. 고모를 통해 옷감과 구두 10켤레를 사다 인근 삼양지서에 바쳤다. 며칠간 잠잠하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밭을 저당 잡혔다. 그것도 잠시였다. 서북청년단원들이 또 나타났다. 돈도 밭도 없던 어머니와 가족들은 이들을 피해 들녘을 떠돌다 밤이 되자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외할머니 집으로 옮긴 뒤에는 어머니와 작은 누나는 매일 아침 삼양지서로 끌려갔다가 저녁에야 돌아왔다.
눈보라가 몰아친 어느 날, 어머니와 누님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외삼촌이 끌고 온 구르마(마차)에는 가마니에 덮인 채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와 작은 누님이 있었다. 아직 숨이 멎지 않은 작은 누님은 누군가가 물을 받아먹은 뒤 숨을 거뒀고, 어머니와 함께 묻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만 보여달라는 이씨의 애원을 외면했다. 주검이 너무 처참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 집에 숨어 살던 큰형은 1949년 봄,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유인물을 보고 자수했다. 제주주정공장에 수용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형을 보기 위해 주정공장 주변을 배회하던 이씨는 둘째 형이 또 다른 수용소(건입동 주민센터 자리)에 갇혀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주정공장 인근이다. 그러나 그는 더는 형들을 볼 수 없었다. 둘째 형도 1949년 6월께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유인물을 보고 경찰에 자수했으나, 같은달 28일 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10월2일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됐다. 이날 하루에만 대통령 이승만의 재가로 249명이 대량 처형됐다.
큰형은 같은 해 7월2일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를 거쳐 부산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발발 뒤 행방불명됐다. 큰형과 둘째 형은 각각 2021년 3월16일과 지난해 9월26일 4·3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언제나 한성이 형님을 생각하고 잊지 않았다”는 이씨에게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열린 제2회 세계제주인대회에서 재미제주도민회 회장 자격으로 뉴욕 거주 제주 출신 교민 20여명과 함께 제주를 찾았다가 형을 찾으러 유전자 감식을 위해 채혈을 했고, 이번 신원을 확인하게 됐다. 이씨는 지난달 8일 제주4·3평화재단으로부터 형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날 또 다른 유해의 주인공 강문후(당시 39살)의 아들 강기수(78)씨는 “3살 때 아버지가 희생됐다. 어릴 때는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고 혼자만 고민했다. 날이 가다 보니 4·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 7일 유해가 확인됐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며 참석자들에게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이날 신원이 확인된 유해 2구는 제주4·3평화공원 내 유해봉안관에 안치됐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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