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주재관 근무 태만...‘요소수 대란’ 부른 中발표도 놓쳤다
2021년 10월 13일, 한국의 관세청에 해당하는 중국 해관총서가 요소(尿素)의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중국이 호주와의 무역 전쟁으로 석탄 수입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석탄으로 생산하는 요소의 수출을 막아 중국 내 석탄 소비를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한국에서 ‘요소수 대란’을 불러왔다. 요소를 물에 타 만드는 요소수는 디젤 자동차의 운행에 필수적인데, 한국은 요소수의 97%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소수가 동나면 전국의 화물차들이 멈춰설 판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중국이 요소 수출을 제한한 지 일주일 넘게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 경제 부처에서 중국에 파견한 주재관(駐在官)들이 제 업무를 소홀히 한 탓이었다. 이들은 2021년 9월 중국 정부가 수출 제한 조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는데도 이를 파악하지 못했고, 10월 13일 수출 제한 조치가 해관총서 홈페이지에 공고됐는데도 이마저 놓쳤다. 닷새 뒤인 10월 18일, 관세청에서 파견된 주중국대사관 관세관은 공고문을 대사관 직원에게 번역해보게 했다. 그러나 그도 중국의 요소 수출 제한이 한국에 무슨 영향이 있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한국 기업이었다. 한 기업이 주상하이총영사관에 ‘중국의 요소 수출 제한으로 국내에서 요소수 품귀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제서야 이 문제가 주중대사관과 산업통상자원부에 보고됐다. 관계 부처가 첫 대책 회의를 연 것은 10월 29일이었다.
이날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주요 20국(G20) 정상회의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약식 회담을 했다. 하지만 정 장관은 회담에서 중국의 요소 수출 제한을 거론하지 않았다. 정 장관은 후에 국회에서 “그 이전에 출국했기 때문에 요소수 문제를 보고받지 못한 상태였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11월 9일 중국으로부터 국내에서 2개월간 쓸 수 있는 양의 요소 수출 승인을 받아냈지만, 그 뒤로도 한동안 요소수 품귀 사태가 계속됐다. 중국 주재관들이 요소 수출 제한 조치를 제때 파악하고 우리 정부에 알려 조기에 대응하게 했다면, 요소수 대란은 애초부터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감사원이 20일 공개한 ‘재외공관 운영 실태’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주미국대사관, 주중대사관 등 주요 재외공관 14곳에 파견된 주재관 44명이 2022년 본국에 보낸 전문 4114건의 절반이 넘는 2143건(52.1%)이 주재국의 정부 문서나 언론 보도를 ‘복사·붙여넣기’ 하거나 번역·요약만 해서 보낸 문서, 또는 ‘일시 귀국 허가 신청’ ‘포상자 추천’ 같은 단순 행정 문서였다. 주재국의 주요 인사를 만나서 비공개 정보를 입수하거나 우리 국민이나 기업을 지원하는 행사를 열거나, 우리 국민·기업이 제기한 민원을 처리해 주는 등의 ‘핵심 활동’과 관련한 전문은 1971건(47.9%)으로 절반이 안 됐다.
‘핵심 활동’의 비중은 주재관에 따라 편차가 극심했다. 주프랑스대사관 재경관, 주중대사관 재경관, 주일본대사관 국세관, 주브라질대사관 상무관 등은 2022년 내내 우리 국민·기업의 민원을 해결해준 실적이 ‘0건’이었다. 주일대사관 관세관은 2022년에 본국에 보낸 전문 117건 중 108건(92.3%)이 일본 관세 당국이 우리 관세청과 맺은 협약에 따라 자동적으로 제공하는 동향 보고서를 단순 요약한 것이었다. 이 관세관이 이 기간에 했다는 ‘민원 대응’ 14건 중 12건은 다른 기관으로 민원을 넘기거나, 전화상으로 또는 온라인으로 단순 정보를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나 현지에서 할 필요가 없는 일들만 한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주중대사관과 주일대사관, 주상하이총영사관 상무관은 각각 기업 민원을 40건 넘게 해결하면서 발로 뛰고 있었다. 주중대사관 국세관, 주뉴욕총영사관 국세관 등은 본국에 보낸 전문의 90% 이상이 주재국 주요 인사와의 접촉 결과, 미공개 정보 입수, 기업 민원 해결 등 핵심 업무와 관련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제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주재관들에 대해 가해지는 불이익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외공관장들의 주재관에 대한 평가가 형식적이거나 온정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2022년 주재관의 90% 이상이 평가에서 5개 등급 가운데 1·2등급을 받았다. 2022년 주뉴욕총영사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재관들의 업무 실적을 잘 모른다’며 주재관 6명에게 전 항목에서 최고 등급을 줬다. 같은해 주일대사는 관세관이 근무일 218일 중 150일(68.8%)을 지각했는데도 ‘성실성’ 항목에 최고 등급이나 차상위 등급을 줬다. 일을 게을리 하건 열심히 하건 같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주재관들의 원 소속 부처들조차 재외공관장들의 평가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감사원은 재외공관을 운영하는 외교부에 주재관들의 업무를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는 등의 활동 기준을 마련하고, 근무 평가가 주재관들의 실제 업무 실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하라고 통보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마지막 여성 광복군’ 오희옥 애국지사 별세…향년 98세
- 野 ‘검찰 특경비 전액 삭감’에...법무부, 일부 사용 내역 제출
- ‘솜주먹’으로 279억 번 타이슨
- 개가 얼굴 물었는데 “잘못 없다”… 목줄 안한 견주 벌금 500만원
- 美 에너지 장관 된 ‘석유 재벌’... 친환경 정책 줄폐기 예고
- [만물상] 머스크식 ‘주80시간 근무’
- 야탑역 살인 예고범, 경찰·장갑차 출동비 수천만원 물어낼 판
- ‘李 위증교사’ 선고 앞둔 23일도 野 도심집회
- BTS 첫 제대 ‘진’... 3800명 아미 앞에서 솔로 쇼케이스
- ‘이강인 스승’ 하비에르 멕시코 감독, 관중이 던진 캔 맞아 출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