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옥중 투쟁하며 '한국 민주화' 언급…"러시아도 가능"

황철환 2024. 2. 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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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나발니 생전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수백통 입수
알렉세이 나발니 추모공간에 놓인 사진과 꽃들 (프랑크푸르트 AFP=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옛 러시아 영사관 앞에 마련된 알렉세이 나발니를 위한 추모공간에 놓인 사진과 꽃들. 2024.2.19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생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맞서 옥중 투쟁을 이어가면서 직접 한국의 민주화를 거론하며 러시아의 앞날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19일(현지시간) 전해졌다.

이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6일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돌연사한 나발니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생전 그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입수해 이같이 보도했다.

이들 중 지난해 9월 편지에서 나발니가 한국의 민주화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나발니는 언론계 지인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만약 한국과 대만이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러시아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고 NYT는 전했다.

나발니는 그러면서 "희망. 나는 이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러시아 국영기업과 고위관료의 부정부패를 폭로해 온 그는 생전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불렸다.

2017년과 2020년 두 차례나 독극물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기고도 2021년 1월 독일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뒤 투옥돼 감옥 생활을 해 왔다.

러시아 검찰은 극단주의 활동 선동은 물론 사기, 횡령, 법정모독 등 각종 혐의로 그를 기소했고 법원은 기다렸다는 듯 도합 30년이 넘는 중형을 선고했다.

나발니는 모스크바에서 200여㎞ 떨어진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작년 12월 갑작스레 혹독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제3 교도소로 이감됐다.

교도소 당국은 나발니가 산책 후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고 숨졌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사망 하루 전날까지도 화상재판에서 농담을 던지며 웃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온전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망 직전까지 지인들과 주고받은 수백통의 편지에서도 나발니가 고된 수감생활에 정신이 흐려졌다고 볼 정황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NYT는 분석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 (모스크바 AP=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건물 인근의 옛 소련 정치범수용소 기념물 앞에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미로 헌화하는 시민들. 2024.2.19

나발니는 300일 넘게 독방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검열을 전제로 인터넷을 통한 서신 교환을 허용하는 교도소 규정을 활용해 외부와 꾸준히 연락을 유지하며 국내외 정세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는 라트비아에 망명한 러시아 사진가 예브게니 펠드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해 미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건 공약들이 "정말로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고령인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면서 "이처럼 상황이 명확한데도 민주당은 걱정이 안 되나"라고 물었다.

나발니와 편지를 주고받은 인물 중에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으로 196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예비선거 중 암살된 로버트 F.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딸 케리 케네디도 있었다.

나발니는 인권 활동가인 케리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버트 F. 케네디의 연설 중 강대한 억압과 저항의 벽을 무너뜨리는 '희망의 물결'과 관련한 인용구가 담긴 포스터를 보내준 데 감사를 표하면서 "언젠가 이걸 내 사무실 벽면에 걸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수감생활을 일종의 '우주여행'으로 묘사하곤 했던 그는 독서를 독방생활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케리 케네디가 공개한 알렉세이 나발니의 생전 편지 [케리 케네디 인스타그램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서신에서 1년간 영어로 된 서적만 44권을 독파했다고 털어놨다.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 경험이 담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다시 읽고 "(옛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의) 공포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이제야 실감하기 시작한다"고 적기도 했다.

네덜란드로 망명한 자유주의 성향의 러시아 언론인 미하일 피슈만과 푸틴의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두고 편지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나발니는 옛 소련 체제를 바꾸는데 실패한 것이야말로 "옐친을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작년 말 '북극의 늑대'로 불리는 제3 교도소로 이감돼 더는 인터넷으로 서신을 교환할 수 없게 된 뒤에도 나발니는 가족 등을 통해 주변과 연락을 이어왔다.

지난달에는 한국기업 팔도의 컵라면 '도시락'을 여유롭게 먹고 싶다며 식사 시간 제한 폐지를 요구했다가 거부되기도 했다.

러시아는 내달 15∼17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서류상 문제 등을 이유로 현 정권에 비판적인 야권인사들의 후보 등록을 거부한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여유있게 5선에 성공, 2030년까지 임기를 연장할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나발니의 돌연사와 관련해 도마 위에 올랐지만 이날 현재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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