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칼럼] 벌써와 아직도

한겨레 2024. 2. 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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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KBS)에서 ‘세월호 10주기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공영방송에서 반드시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방송 일정이 6월 이후로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재난과 엮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시리즈로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해마다 되새기는 역사적 사건들을, 총선을 잣대로 저울질하는 것은 편협한 단견이다. 총선 전후 한두달을 영향권으로 본다는 변명 앞에서, 3·1운동이나 5·18광주민주화운동도 검토 대상인지 확인하고 싶다.
집필실 앞마당에 있는 산수유나무 ‘벌써’. 김탁환 제공

김탁환 | 소설가

올해도 집필실 앞마당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망울을 먼저 터뜨렸다. 다른 나무들보다 적어도 열흘은 빠르다. 겨울이 지나고 벌써 봄이 왔구나, 혼잣말하다가, 이름을 ‘벌써’라고 지었다.

봄꽃들이 섬진강을 따라 올라오면,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꺼내 읽는다. 1947년 출간된 ‘이것이 인간인가’로부터 39년이 지난 뒤 세상에 나온 마지막 저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참상에 대한 증언은 ‘이것이 인간인가’가 훨씬 생생하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누가 어떻게 그 사건을 기록하였고, 보존되거나 변형되거나 삭제된 기억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어야 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주장들이 어깨동무한다.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기 마련이며 그처럼 비인간적인 사건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제 용서하자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꼼꼼하게 반박한다. 수용소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은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으며, 가해자들을 악마나 정신병자로 취급해선 안 되고,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참극은 또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모은 자료를 분석하고 관련자를 만나고 말 못 한 부분들을 찾아내어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시간이 꽤 흘렀고 가해자들 대부분을 법정에 세워 벌했으며 새로 나올 자료도 없으니 이제 그만 용서하자는 주장에는, 이야기를 그치자는 뜻이 담겼다.

프리모 레비만 그 사건을 이해하고자 평생 집요하게 고민하였을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올해로 10년이다. 2015년 봄 우리는, 벌써 1년이 지났다며 놀라기도 했다. 그때의 놀라움엔 침몰한 세월호가 인양되지도 않았고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지도 못한 채 한해를 보냈다는 울분이 실렸다. 그 봄과 그 아침이 다시 오는 까닭을 희생자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여겼다.

한국방송(KBS) ‘다큐인사이트’에서 ‘세월호 10주기 방송-바람과 함께 살아낼게’(가제)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공영방송에서 반드시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방송 일정이 4월18일에서 6월 이후로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재난과 엮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시리즈로 만들라는 제작1본부장의 지시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4월에는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유난히 많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제주4·3사건과 4·19혁명도 이달에 일어났다. 해마다 되새기는 역사적 사건들을, 총선을 잣대로 저울질하는 것은 편협한 단견이다. 총선 전후 한두달을 영향권으로 본다는 변명 앞에서, 3·1운동이나 5·18광주민주화운동도 검토 대상인지 확인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의 존립 근거가 흔들린 사건이다. 이를 배제하고 지난 10년과 앞으로 10년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서서 취재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질문들을 뽑아내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그동안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여전히 던지는 의문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참사의 진상은 어디까지 밝혀졌는가. 이 참사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덧붙여 공영방송에 묻고 싶다. 역사적 사건들을 묶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라는 틀로 조망할 수도 있겠지만,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는 지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는가.

집필실을 오갈 때마다 논 옆으로 난 비탈길에서 배롱나무를 만난다. 그 나무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추수를 마친 뒤에도 여전히 홀로 붉기 때문이다. 겨울이 코앞인데 아직도 꽃이 떨어지지 않았구나, 혼잣말하다가, 이름을 ‘아직도’라고 지었다.

총선이니 민감한 이슈는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민감한가 아닌가를 누가 판단하며 또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민감하다고 방송에서 제외하는 것이 타당한가.

4월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이 알고 싶고 따지고 싶은 문제들을 터놓고 논하는 이야기판이 되어야 한다. 배제와 침묵은 선거의 본질을 훼손한다. 깊이 오래 숙고할 난제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한걸음 더 바짝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각 당의 입장과 후보자들의 의견을 밝히고 뜨겁게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벌써’ 10년을 맞는 생각과 느낌은 무엇이며 ‘아직도’ 풀지 못한 과제는 무엇인가. 해결 방안까지 모두 보고 들은 후, 귀중한 한표를 행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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