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같은 ‘75년만의 봉환’

임성준 2024. 2. 2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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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 날아든 4·3 행방불명 형 유해 확인
4·3 당시 어머니·두 형·누이 잃은 재미제주도민회장
2023년 세계제주인대회 참석했다가 채혈
2009년 제주공항 발굴 유해 신원 확인
두형 모두 재심 무죄 판결
지난 1월 뉴욕에 사는 재미제주도민회장 이한진(88)씨는 2009년 제주공항에서 발굴한 유해가 4·3 당시 행방불명된 작은형 한성(1923년생)씨라는 소식을 접하고 ‘형님’을 목놓아 불렀다.

이 회장 작은형의 ‘76년만의 봉환’은 기적이었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열린 세계제주인대회에 뉴욕 교민 20여명과 함께 참석했다. 그는 무죄선고받은 작은형의 판결문을 들고 큰형과 작은형의 4·3평화공원 행불인 표석을 참배하며 두 형님께 눈물의 보고를 올렸다. 작은형 이한성은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뒤 행방불명됐다. 지난해 9월 26일 제주지방법원 제39차 군법회의 직권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큰형 이한빈(1919년생)은 1949년 7월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중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은 뒤 행방불명됐다. 그는 2021년 3월 16일 유족 청구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2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평화교육센터에서 4・3희생자 발굴유해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가 열리고 있다. 제주도 제공
하지만 두 형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행불인 표석에 이름만 있을 뿐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대전골령골 발굴유해 신원확인 봉환행사에 참석해 혹시나하는 마음에 유가족 채혈에 참여했다. 지난 1월 2009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동북쪽에서 발굴한 유해의 유전자 대조결과 작은형으로 밝혀졌다는 소식이 뉴욕으로 날아들었다. 

이 회장은 20일 가족과 함께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행방불명 4·3희생자 신원확인결과 보고회에 참석했다.

이 회장의 작은 형 이한성(4·3당시 제주읍 화북리 거주)은 4·3 당시 서북청년회 단원들의 폭압으로 인해 피신생활 중 1949년 6월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군경의 유인물을 보고 화북국민학교에 주둔하던 경찰에 자수했다. 그러나 군경의 회유와는 달리 1949년 6월 28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수십명과 함께 트럭에 태워져 제주공항쪽으로 끌려갔다는 마을주민으로부터의 소식을 끝으로 행방불명됐다.

희생자의 유해가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동북편에서 발견되었기에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와 누나가 희생됐고 큰형 이한빈 역시 육지 형무소로 끌려 가 행방불명됐다.

이 회장 증언 등에 따르면 화북1동 ‘벌랑’ 마을(삼양과 경계 지역) 출신으로, 일제시대 할아버지는 무역선을 운영할 정도로 부자였다. 서당도 운영해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습득했다. ‘벌랑’이라는 마을 이름도 할아버지가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이홍석)는 해방 이전인 1940년 사망했다. 해방이 되자 학식이 높은 큰형은 일본에서, 작은형은 공부하던 만주에서 귀향했다. 청년운동을 하던 작은형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이 때부터 가족 수난사가 시작됐다.

1948년 5‧10 총선거가 무산되자 청년 무차별 검거에 따라 작은형의 쫓기는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12살이던 이 회장도 동네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도피자 가족’이라며 집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와 누나를 끌고 갔다. 1948년 12월 동네사람들과 함께 어머니(당시 47세)와 누나(당시 17세)가 학살당했다. 큰형은 민보단 간부로 활동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중 작은형이 토벌대에 쫓기다 총상을 입자 토벌대 위협에 위기를 느낀 큰형은 친척 집 천장에 숨어 지냈다. 1949년 큰형이 먼저 자수해 주정공장 고구마창고에 수용됐다. 이후 군법회의에 의해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뒤 행방불명됐다. 작은형도 자수하자 산지물 인근 건입동사무소에 수용됐다. 작은형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고아가 된 이 회장은 고모 등 친척집을 전전하며 주경야독으로 제주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결혼을 하고 슬하에 자녀 1남 1녀를 뒀지만 연좌제의 불안에 시달리던 중 1976년 뉴욕으로 이주, 마트를 운영하며 정착했다. 재미제주도민회 회장을 역임하고 장학금 기탁 등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이 회장은 2019년 뉴욕 소재 UN본부에서 열린 4‧3인권심포지엄에 예일대 의대교수와 의사, 코널대 법대교수, 변호사 활동을 하는 자녀와 사위, 며느리와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4·3 당시 어머니와 누님을 잃었고 큰형님은 군법회의로 15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으며 작은형님은 사형을 받고 행방불명돼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며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며 살아오다 지난해 세계제주인대회 참석자 제주에 왔을 때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형님들이 계신 4·3평화공원 행불인표석에서 눈물의 보고를 드리고 유가족 채혈에 참여했는데 이렇게 기적적으로 작은형님의 신원이 확인돼 너무 기쁘다”고 전했다.

이날 4·3희생자 발굴유해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에는 2007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서북편 동측구덩이에서 발견된 희생자 강문후(1909년생) 유족도 참석했다.

희생자는 1948년 가을 소개령으로 인해 가족들과 안덕면 화순리로 이주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치안질서를 명목으로 시행된 예비검속에 따라 1950년 7월 이유도 모른 채 모슬포경찰서 안덕지서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고, 행방불명됐다. 희생자의 유해가 제주공항 남북활주로의 서북편에서 발견되었기에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3으로 인해 어머니와 형수가 희생되었고, 희생자의 큰딸도 행방불명됐다.

희생자 아들은 “아버지와 형이 예비검속으로 같이 구금됐으나, 결국 형만 돌아오고 아버지는 소식이 끊겨 행방불명 됐다”며 “이제라도 아버지를 찾아 모시게 돼 너무 기쁘고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오영훈 지사는 추도사를 통해 “행방불명 4·3희생자 유가족의 추가 채혈을 독려하고, 유해발굴 및 유전자감식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마지막 행방불명 희생자 한 분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며 “가족의 품에서 평안히 안식하시기를 바라며, 통한의 세월을 버텨온 유족 한 분 한 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유해 413구 발굴…희생자 144명 신원 확인

이날 신원이 확인돼 가족을 찾은 희생자들은 군법회의 희생자 1명, 예비검속 희생자 1명이다.

지난해 4·3희생자 유가족 283명이 참여한 채혈분과 제주국제공항 발굴유해의 유전자 대조 결과, 행방불명 희생자 2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특히 올해 신원 확인은 지금까지 채혈에 참여하지 않았던 직계 및 방계 유족의 추가 채혈을 통해 파악됐다. 한 명의 행방불명 희생자에 대한 유가족 다수의 적극적인 채혈 참여가 신원확인 가능성을 높였다.

한편, 행방불명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발굴은 지난 2006년 제주시 화북동 화북천을 시작으로 2007년~2009년 제주국제공항, 2021년 표선면 가시리외 6개소, 2023년 안덕면 동광리 등 도내 곳곳에서 진행됐다. 이를 통해 총 413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대전골령골에서 신원이 확인된 1명을 포함해 총 144명이 됐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올해도 유해발굴 및 발굴유해 유전자 감식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또한 지난해 도외 지역 희생자 중 최초로 신원이 확인된 한국전쟁 전후 대전 골령골 학살터 뿐만 아니라 광주형무소에 암매장된 유해 가운데 4·3 수형인들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에 대한 유전자 감식과 대조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제주=임성준 기자 jun258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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