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파우치” 대신 “메멘토 모리”를
[뉴스룸에서]김진철│문화부장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문화방송(MBC) 사장실에 걸린 그림을 보고 이 말을 중얼거렸다. 최근 한겨레 취재진이 안형준 사장을 인터뷰하며 찍은 사진에 고 이용마 기자의 초상화가 있었다. 엠비시 기자 이용마는 이명박 정부 때 파업을 벌이다 해고된 뒤 지독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5년9개월 만에 복직한 그는 2년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6년여 전 제5회 리영희상을 받은 그가 아내와 두 쌍둥이 아들 곁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잊을 수 없다.
“함께 무대에 올라 꽃다발과 상을 받았으니, 아이들이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 즐기는 일, 그런 일을 하면서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에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런 사회가 되기에는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우리 사회에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사회, 그런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꿈꿔봅니다.”
그가 마이크를 쥐기도 힘든 몸을 휠체어에 싣고 한겨레신문사 시상식장까지 온 것은, 어린 두 아들에게 ‘아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생명의 불꽃이 조금씩 소진되어가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면서도 담담히 ‘꿈’을 이야기하던 그는, 그때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아버지의 손을 꼭 쥐고 있던 두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끝내 놓지 않은 꿈을 키워가고 있을 것이다.
그가 용기 내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에 맞서 투쟁한 것도, 병마와 싸워가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도, 마른 몸피로 두 아들 손을 잡고 시상식장에 등장한 것도,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겸허하게 해야 할 일을 하고 탐욕과 불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을 되뇌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생때같은 159명을 차디찬 길바닥에서 잃은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한다. 그들은 추운 거리를 떠돌며 어느덧 두번째 잔인한 봄을 맞이하고 있다.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서까지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정부 해경 지휘부가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을 받는 장면을 보며 바람 찬 거리에서 10년이 다 되도록 눈물을 떨궜다.
고대 로마시대, 승전한 장군은 개선식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속에 “메멘토 모리”라는 속삭임을 들어야 했다. 개선장군과 함께 마차에 탄 노예가 “죽음을 잊지 말라”고 거듭 말하도록 함으로써, 오늘 승리했지만 내일은 죽을 수 있음을 깨어 인식하게 했다. ‘지금은 여기 승전한 환호 속에 있지만 그대 역시 필멸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 당신도 언젠가 죽을 터이니 늘 겸손하고 경계하라는 노예의 속삭임이 없었다면, 백전백승의 자만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장군의 앞날은 어떨까.
윤 대통령과 정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메멘토 모리”라는 속삭임이다.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미래를 준비한 대통령”(2월7일 방송한 한국방송(KBS) 특별대담)이 되고 싶다는 윤 대통령 면전에서 입이 틀어 막히고 사지를 들려 연행당한 카이스트 졸업생은 “알앤디(R&D) 예산을 복원하십시오”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메멘토 모리”가 개선장군의 목숨을 장차 구할 말인 것처럼,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통령님. 국정 기조를 바꾸셔야 합니다”(1월18일 윤 대통령 경호원에게 끌려나가기 전 강성희 진보당 의원 발언)라는 말은 윤 대통령과 정권을 살릴 말이다.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한국방송 특별대담에서 박장범 앵커) 같은 말이 넘쳐나고 뉴스타파와 한국방송, 와이티엔, 엠비시와 비판 언론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일들이 거듭된다. 대통령 후보 검증 보도를 ‘가짜뉴스’로 폄훼하는 것도 모자라 범죄 취급하는 행태는 만용이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행동대장처럼 이용해 공영방송의 사지를 결박하고 언론 자유를 틀어막으려는 오만한 시도의 귀결은 너무나 뻔하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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