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한 바퀴 돌아 한국 상륙한 ‘양고기’
영국 식문화의 핵심 양고기
영국에 음식(food)은 있어도 요리(cuisine)는 없다는 우스갯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 음식은 악명 높다. 인도식 카레가 영국 최고의 음식이라는 농담도 있지만, 영국에서 '국가의 특유성을 갖춘 요리’라 부를 수 있는 건 양고기를 활용한 음식들일 것이다.일요일 교회에 가기 전 오븐에 양고기를 넣고 천천히 익힌 뒤 민트 소스를 곁들여 먹는 선데이 로스트(sunday roast)는 진정 영국 요리라 부를 만하다. 이는 영국의 식문화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골 양치기 목동의 식사였던 셰퍼드 파이(shepherd pie)도 양고기를 활용한 영국 특유의 전통 음식이다. 양고기는 영국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다.
양은 여타 가축들과 구분되는 이점이 하나 있다. 1년에 한 번씩 인간에게 양모를 제공하고 모직물로 가공된다. 그렇기에 오래전부터 영국 귀족들은 농산물 대신 양을 키웠으며, 양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양고기는 곧 영국 식문화의 한 축으로 발전했다.
양고기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은 대항해시대에 신대륙으로 뻗어나갔다. 그때 배에 실었던 양은 신대륙의 주요 소득원이 됐으나 미국은 상황이 달랐다. 들판의 늑대부터 시작해 포식자들의 위협이 가득했던 미국에서 양의 생존율은 낮았고, 어린순까지 다 뜯어 먹는 양 특유의 습관이 미국 서부 지역 목초지 환경 특성과 맞지 않아 생태를 황폐화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목초지를 두고 벌인 소 목축업자들과의 경쟁에서 양 목축업은 밀려났다.
딩고(dingo) 이외에 별다른 맹수가 없고 풀이 빠르게 자라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양 목축업은 큰 산업으로 발전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양고기는 20세기 들어 한국으로 수출됐으며, 지금은 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품목으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양고기의 95%는 호주산, 5%는 뉴질랜드산이다. 따라서 최근 국내에 확산 중인 양고기 식문화는 영국의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지구 한 바퀴까지 돈 뒤 한국에 진출한 나비효과라 할 수도 있다.
국내산 양고기 생산은 미미한 상황이다. 농림축산식품통계연보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양 사육 농가는 73개소로, 돼지(6078개소)와 사슴(1312개소)보다 적다. 사육 개체수도 2315마리로 1000만 마리가 넘는 돼지, 2만4000여 마리의 사슴보다 그 규모가 월등히 작다. 게다가 육용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주로 체험 농장에서 사육되는 정도다. 국내에서 소비되고 있는 양고기는 전량 수입산이며, 그 양은 2010년 3415톤에서 2020년 1만7344톤으로 무려 5배가 성장하는 등 새로운 식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맛, 합리적인 가격으로 외식업계 장악
양고기에는 특유의 향이 있다. 대체로 양의 월령이 높을수록 강해진다. 주로 이 육향이 양고기에 대한 호불호를 만든다. 최대 12~18개월 이내의 양고기를 램(lamb)이라 부르고, 그보다 더 나이 든 양고기는 머튼(mutton)이라 칭한다. 국내에 수입되는 양고기는 거의 램이다. 육향이 강하지 않은 편이지만 먹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최근 양고기의 육향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실감한다.국내에서는 연변 지역 출신 교포들이 양꼬치 전문점을 열며 양고기 확산이 시작됐다. 2015년 칭다오 맥주와 함께 안주로 저렴하게 먹는 것이 유행하며 빠르게 외식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양꼬치 전문점에서는 양고기를 작은 꼬치에 꽂아 숯불 위에서 굴리며 익힌다. 쿠민이 많이 들어간 중국식 쯔란에 찍어 먹는 방식을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이미 양고기를 즐기는 방식이 한국화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004년 개점한 양갈비 전문점 '램하우스’는 호주산 6월령 이하의 신선 양고기를 항공으로 직접 받아 양 특유의 향이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양갈비는 스테이크 형태로 준비한다. 이를 숯불에 구운 뒤 가위로 잘라 마치 소금구이처럼 서비스하는데, 남은 뼈대는 조금 더 구워서 뼈째 손으로 들고 뜯어 먹는 방식을 제안한다. 현재 우리가 즐기는 한국식 양고기 구이의 표준을 제시한 식당이라 할 수 있다.
서울 노량진에 위치한 '운봉산장’ 역시 한국식 양고기 요리 전문점이다. 이곳은 입구에 '양꼬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았다. 우리나라에선 '양꼬치’라는 메뉴가 없느냐 있느냐에 따라 한국식이냐 아니냐로 구분된다. 운봉산장의 대표 메뉴는 부추와 함께 부드럽게 쪄낸 양갈비 수육이다. 전형적인 한국풍 음식이다. 구워서 돌판에 양파, 마늘과 함께 올려 내는 양갈비구이 역시 한국적이고, 빨간 국물에 들깻가루를 듬뿍 푼 양전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3가지 대표 메뉴는 약 30년 전 서울 종로5가 뒷골목 영양탕 집 음식 모습과 흡사하다. 고기만 바뀐 셈이다.
‘양인환대’는 양고기 부위육을 다양하게 즐기는 한국식 고급 양고기구이의 대표 식당이다. 부위별 다른 식감과 육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만 가격은 만만치 않다. 하루에 한 팀만 받는 용산의 '양인환대 극진’에서는 셰프와 대면하며 양고기의 A부터 Z까지 학습하듯 즐길 수 있다. 예약은 이미 1년 치가 차 있다. '램브란트’는 양고기라는 소재를 고급 파인 다이닝으로 다양하게 풀어냈다. 양고기를 좋아하는 연인들이 좋은 분위기에서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이다.
양고기 외식문화의 한국화
뺄 수 없는 독특한 양고기 전문점은 1991년 마포에 오픈한 '램랜드’다. 식당 안은 시끌벅적한 전형적인 고기구이 집 모습이다. 한국식 불판 위에서 양고기를 구워주는데, 먹을 때의 구성과 방식이 희한하다. 우선 6등분한 토르티야를 손바닥에 올린 다음, 양에서 흘러나온 기름과 구워서 말랑해진 양파 한 조각을 토르티야 위에 겹친다. 그러고 나서 양고기를 이 집만의 겨자소스에 푹 찍어서 양파 위에 놓는다. 그리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마카로니 콘샐러드와 블랙 올리브를 그 위에 올린다. 마지막으로 불판 위 기름에 익은 통마늘 한 조각을 더한다. 이 모든 것을 반드시 한입에 먹는다. '끔찍한 혼종’일 것 같은 이 조합은 너무나 한국적인 천상의 맛으로 느껴진다. 단골들은 30년간 마포에서 진화하며 만들어낸 맛의 조합이라 평한다. 램랜드의 양고기는 특유의 육향이 꽤 있는 편이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 필자는 이곳 양고기 쌈을 먹고 나온 뒤 한참 동안 그 맛을 잊지 못했다.
국내산양고기를 식당에서 만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일까? 양도 품종이 있고, 각 문화권 마다 식문화에 맞는 양을 기른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식재료를 볶거나 튀기며 특유의 향을 입힐 때 양 꼬리 지방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에 특화된 양을 기른다. 돼지 삼겹살과 소고기 등심구이를 사랑하는 한국인 식문화에 특화된 양을 기른다면, 머지않아 새로운 국내산 고급 식재료로 양고기가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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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문정훈
문정훈 서울대 푸드비즈니스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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