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6개월 → 9개월… 먹기 애매한 ‘불안의 마지노선’ 허물다[안전한 食·醫·藥, 국민건강 일군다]
통상 유통기한보다 20 ~ 30% ↑
경제성·환경 ‘두토끼 잡기’ 목표
매출 상위100개사 5만여 품목중
23사 2386개가 소비기한 전환
식약처 “냉장·냉동품 소비기한
구매 ~ 보관 온도변화까지 반영”
소비자 인식변화 가장 큰 과제
누구나 한번쯤 유통기한이 2, 3주 정도 지난 라면을 쓰레기통으로 보낼지 냄비 안으로 넣을지 고민해봤을 것이다. 먹기에는 불안하지만, 냄새도 나지 않고 ‘유통기한만 안 봤더라면 기분 좋게 먹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유통기한에 대한 부담이 컸지만, 수 주 지난 라면은 안전계수 내에 있었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라면은 통상 6개월이 유통기한이나 소비기한은 3개월 정도 더 늘어난다.
지난 2023년 한 해 동안 계도기간을 거쳐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소비기한이 시행됐다. 식품 소비기한은 제품에 표시된 보관 방법을 준수하는 경우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기한으로, 통상 유통기한보다 20∼30% 길게 설정된다. 소비기한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식품의 품질 변화가 없는 최대 기간을 측정하는데, 유통환경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한 안전계수를 곱하여 설정한다. 일반적으로 유통기한은 0.6∼0.7, 소비기한은 0.8∼0.9의 안전계수를 적용한다. 결론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섭취해도 안전하다는 검증을 거친 것이다.
◇경제성·환경, 두 마리 토끼 잡는 ‘소비기한’ =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계도기간 동안 유통기한에서 소비기한 전환 품목 비율은 3.3%(9월)에서 4.5%(12월)로 상승했다. 특히 국내 매출 상위 100개사 5만3299개 품목 중 23개사 2386개 품목이 소비기한으로 전환됐다. 정부는 주요 식품 유형별로 6개 분과 민·관 협의체를 구성하고 분과별로 대기업·중소기업·협회 등에서 10∼15명을 위원으로 편성해 소비기한 확대를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6개 주요 품목은 △과자·빵류 △유가공품·음료류 △식육가공품 △즉석섭취·편의식품류 △두부·면·소스류 △수산가공식품 등 기타로 분류된다. 정부는 이미 전환한 대기업 선도품목의 소비기한 설정항목을 중소기업에 제시해 전환을 유도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정부가 소비기한 확대에 집중하는 것은 경제성과 환경 모두를 잡기 위해서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부분 국가에서 소비기한 표시제를 운용하고 있는데, 식품안전정보원은 소비기한 제도 도입으로 식품 섭취 기간은 증가하고 식품 폐기량이 감소함에 따라 소비자와 산업계에 연간 약 9120억 원의 경제적 편익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는 또한 소비기한 적용에 따라 식품 폐기량이 감소하고, 이로 인해 탄소 배출이 줄어드는 등 환경적인 이익을 얻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소비자들은 소비기한이 유통기한에 비해 긴 만큼 건강에 유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경쟁이 심한 업계에선 소비기한을 기존 유통기한에 맞추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잡으려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통기한이 처음 도입된 1985년과 현재는 식품의 제조·유통환경이 크게 다르다”고 지적한다. 최근 국내 가공식품의 약 90%가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을 적용받고 있고, 냉장 유통환경 또한 크게 발전했다.
◇풀어야 할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 = 식의약 전문가들은 한국이 선진국 수준의 유통환경을 갖고 있는 만큼 식품 섭취 기한을 늘릴 수 있는 소비기한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다만 소비자들 사이에선 가공식품이 아닌 냉장·냉동식품에 소비기한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이에 대해 식약처는 “냉장·냉동제품의 소비기한은 소비자가 구매 후 귀가해 보관할 때까지 온도 변화 등의 변수를 반영해 설정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소비자들의 인식 전환을 소비기한 정착의 가장 큰 과제로 보고 있다.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소비기한의 안전성을 홍보해 정착하려는 것인데, 대기업이 선도적으로 나서고 중소기업으로 확대하는 방향을 꾀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선 소비기한에 맞춰 식품을 섭취해도 될 만큼 유통환경을 갖췄고, 생산 단계부터 보존성을 강화했다는 홍보도 될 수 있다. 식약처는 “대기업·중소기업의 공통 생산 품목으로 소비기한 선도식품을 선정할 것”이라며 “대기업은 자체 설정실험을 통해 선도 품목의 소비기한을 우선 전환하고, 중소기업은 유사 제품에 대해 함께 전환하는 계획으로 제도를 안착시키겠다”고 밝혔다. 특히 정부는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식품에 대한 소비기한 설정 실험 방법과 참고 값 등을 중소기업에 지원해 제도를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
다만 우유 업계는 유통기한 외에도 생산 시점을 표기하는 등 경쟁이 치열하다. 또한 보관 온도에 매우 민감한 우유의 특성 탓에 여름철 상온 노출 시간에 따라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정부는 이를 고려해 우유는 당분간 소비기한에서 예외로 뒀으며, 우유류(냉장보관 제품에 한함) 소비기한은 2031년 1월 1일부터 적용한다.
美선 품질유지기한… 호주·캐나다는 식품섭취권고기한 사용 권장
■ ‘소비기한’ 시행 해외 사례
한국은 지난 한 해 동안 소비기한 전면 실시에 앞서 계도기간을 정했다. 적용되는 식품 범위가 넓고 포장지 교체주기(6개월∼3년)가 다양해 시행일에 맞추기 어렵다는 현실적 여건이 반영됐다. 가장 큰 배경에는 과거 불량식품 파동을 겪으면서 불거진 소비자들의 우려가 컸다. 하지만 경제성과 환경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 한국 또한 다른 국가들과 같이 소비기한으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호주·캐나다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부분 국가 및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 식량 낭비 감소 소비자에게 명확한 정보 제공 목적으로 소비기한 표시제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유통기한에 대한 신뢰가 강하지만, CODEX는 2018년 7월 유통기한을 규격에서 삭제하며, 식품 섭취 권고기한을 소비기한에 맞췄다.
미국은 주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소비기한과 유통기한·포장일자·품질유지기한·판매기한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미 농무부는 식품 보관법을 자세히 명시한 품질유지기한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또한 영국은 소비기한과 품질유지기한을 표시하며, 일본은 소비기한과 상미기한(식품의 맛이 가장 좋은 기간)을 구분해 사용한다. 한국은 다른 선진국 수준으로 식품 유통 규제도 강해 소비기한을 사용하기 용이한 환경이다.
국내 소비자들은 통상 유통기한을 폐기 시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소비기한이나 유통기한 모두 식품의 수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섭취 가능한 안전계수 이내의 시점이다. 소비기한은 ‘소비자가 섭취 가능한 시점’을 중심으로 결정되고, 유통기한은 영업자나 식품 판매업자가 제품을 유통·판매할 때 허용되는 시점을 중심으로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소비기한에 맞춰 식품을 섭취해도 안전하다.
세계를 중심으로 탄소중립이 강조되며 매년 폐기되는 포장 쓰레기와 식품에 대한 우려가 크다. 특히 최근에는 식량안보까지 더해져 식품 폐기를 줄여야 한다는 경각심이 강조되고 있다.
정철순 기자 csjeong110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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