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줍줍]②CB제도, 무엇이 달라지나-만기 전 사채취득
CB 재취득 후 처리방향 '깜깜이 공시' 다수
CB 재매각 시 사실상 신규발행과 유사해
CB취득 사유 및 처리방향 공시 의무화
기업이 사업자금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방법은 은행에게 돈을 빌리거나, 채권을 발행하거나, 주식을 찍어내 파는 방법이 있죠. 때론 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인 메자닌(Mezzanine, 건물 1층과 2층 사이의 공간을 의미)금융도 사용하는데요. 메자닌금융의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전환사채(Convertible Bond)이죠. 발행 당시에는 채권 성격이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병 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전환사채 발행규모는 무려 9조9000억원을 기록했고요. 2022년에는 약 6조원으로 발행규모가 줄었다가 지난해는 약 5조6000억원을 기록했어요. 시기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전환사채는 기업의 중요한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전환사채에 담긴 각종 권리 행사도 늘어나는데요. 대표적으로 채권자가 만기 전에 회사에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는풋옵션(Put Option, 조기상환청구권) 행사도 자주 접할 수 있어요. 이때 회사 입장에서는 채권자에게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데 당장 여유자금을 구할 수 없다면, 일단 풋옵션 행사에 대응해 채권을 되사들인 후 다시 재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기도 해요.
이러한 상황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시 중 하나가 바로 '만기 전 사채 취득'에 관한 내용이에요.'만기 전 사채 취득' 의미
▷관련공시: 녹십자엠에스 2월 5일 전환사채(해외전환사채포함)발행후만기전사채취득
코스닥 상장사 녹십자엠에스가 지난 5일 올린 공시를 보면 지난 2022년 발행한 3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 중 56억5000만원 규모의 채권 일부를 만기가 끝나기 전에 취득했다는 내용이에요.
이 전환사채의 만기일은 2027년 2월까지이지만 녹십자엠에스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가 풋옵션을 행사, 즉 내 돈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불가피하게 회사가 채권의 일부를 취득하게 됐다는 의미예요.
녹십자엠에스는 취득한 채권처리방법으로 '한국예탁결제원에 전자등록 채권을 말소'시키겠다고 공시했는데요. 이 얘기는 회사가 어쩔수 없이 취득한 채권을 재활용하지 않고 그대로 소각, 즉 없애버리겠다는 의미예요. 56억5000만원 규모의 전환사채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추후 주식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사라진 것이죠.
CB 재매각…새로 CB발행한 것과 동일
녹십자엠에스처럼 채권을 말소해버리면 주식전환에 따른 지분가치 희석 우려가 없어지죠. 따라서 이 회사의 주식에 투자 중인 일반투자자들이 더 이상 채권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문제는 만기 전에 사채를 취득하고 이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예요.
▷관련공시: 누리플랜 2023년 12월 18일 전환사채(해외전환사채포함)발행후만기전사채취득
또다른 코스닥 상장사 누리플랜은 지난해 12월 만기 전 사채 취득 공시를 올렸는데요. 같은 해 6월 발행한 전환사채 20억원 중 10억원을 채권자와 협의 하에 조기상환했어요. 누리플랜은 다시 가져온 10억원의 채권을 재매각하겠다고 공시했어요. 즉 10억원의 전환사채를 다시 다른 투자자에게 팔겠다는 의미죠.
회사 입장에서는 현금 10억원을 지출하지 않아도 되지만, 재매각을 하면서 새로운 채권자에 의해 10억원어치 누리플랜 신주가 추후 발행될 가능성이 남았어요. 결국 10억원어치의 전환사채를 새로 발행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죠. 이때 일반투자자들은 잠재적인 물량 부담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해요.
그나마 누리플랜처럼 재매각하겠다고 공시하면 다행이에요. 적어도 일반투자자들이 향후 신주발행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는 있기 때문이죠.
문제는 '재매각한다', '소각한다' 등 그 어떤 의사표시도 하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는 점이죠.취득했는데 어떻게 처리할지는 '노코멘트'
▷관련공시: 뷰노 2023년 11월 2일 전환사채(해외전환사채포함)발행후만기전사채취득
코스닥 상장사 뷰노 역시 지난해 11월 만기 전 사채 취득 공시를 올렸어요. 약 6억800만원어치의 전환사채를 콜옵션 행사를 통해 회사가 취득했는데요. 참고로 콜옵션은 풋옵션과는 다른 개념으로 채권자가 아닌 회사가 행사하는 권리에요. 콜옵션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①편 기사를 참고해주세요. ☞관련기사: [공시줍줍]①CB제도, 무엇이 달라지나-콜옵션 (2월 16일자)
뷰노는 공시를 통해 향후 처리방법을 '이사회를 통해 차후에 결정하겠다'고만 밝혔어요.
약 6억8000만원의 전환사채를 어떻게 됐을까요. 총 두 개의 공시를 확인해야만 투자자들은 만기 전 취득한 전환사채의 행방을 알 수 있는데요.
▷관련공시: 뷰노 2023년 11월 3일 주식등의대량보유상황보고서(일반)
▷관련공시: 뷰노 2023년 11월 13일 전환청구권행사 (제1회차)
바로 위에서 본 '주식등의 대량보유 상황보고서' 공시는 제출인이 이예하 뷰노 사내이사예요. 이예하 사내이사는 11월 2일 뷰노가 취득했던 전환사채의 콜옵션 행사자로 지정되어 전환사채를 취득했고 이를 곧 바로 주식으로 전환했다는 내용이에요.
주식전환을 통해 이예하 사내이사는 뷰노 주식 14만2955주를 확보했어요. 전환가격은 5904원으로 당시 뷰노의 주가(종가기준 3만4850원)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죠.
결국 회사가 취득한 만기 전 전환사채 행방을 알기 위해 투자자들은 다른 공시를 모두 확인해야하는 불친절함을 감수해야 하죠.
또 사실상 취득하자마자 이예하 사내이사가 콜옵션을 행사했다는 점은 회사가 이미 해당 채권을 '만기 전 취득'할 당시에 처리방향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실제 뷰노가 이예하 사내이사를 콜옵션 행사자로 지정한 건 1년 전인 2022년 11월이에요. 그럼에도 회사는 이사회를 통해 차후 결정한다는 '깜깜이 공시'로 투자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때 제공하지 않았어요.
CB취득 시 처리방법 공시 의무화
뷰노의 사례는 투자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한다는 기업공시의 취지와 맞지 않아요. 투자자들은 뷰노가 제출한 '만기 전 사채 취득' 공시만 봤을때는 회사가 전환사채를 회수했고 더 이상 나올 물량은 없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내이사가 콜옵션을 행사하면서 시세보다 훨씬 더 저렴하게 신주를 취득했고 이는 곧 소액주주들의 지분가치 희석으로 이어졌죠.
금융위는 이처럼 '만기 전 취득 후 채권을 재매각'하는 것은 사실상 신규발행과 유사하다고 판단해요. 그럼에도 전환사채 신규발행 공시에 비해 시장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금융위의 판단이에요. 현재 증권의 발행 및 공시에 관한 규정, 한국거래소 공시규정에는 '만기 전 사채 취득' 시 향후 이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사유를 적는 것이 의무는 아니에요.
때문에 실제로 많은 상장사들이 만기 전 사채 취득 공시를 할 때 취득한 채권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추후 논의하겠다', '이사회가 결'정 등 명확하지 않은 내용을 공시에 담아요. 법과 규정이 느슨하게 허용하고 있는 사각지대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것이죠.
이에 따라 지난 1월 금융위는 CB제도 개선을 발표하면서 회사가 만기 전 CB를 취득하면 취득한 이유가 무엇인지, 향후 소각할 것인지 아니면 재매각할 것인지 등을 공시하도록 의무화하기로 했어요.
만약 뷰노처럼 회사 최대주주나 임직원에게 콜옵션을 부여해 주식전환을 할 예정이라면 해당 사유 역시 공시를 통해 투자자에게 알려야 해요.
금융위는 올해 2분기 내에 증권의 발행 및 공시에 관한 규정 및 한국거래소 공시규정을 개정해 만기 전 취득한 CB에 대한 공시를 강화할 방침이에요.
김보라 (bora5775@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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