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꽃축제 열리는 신안] 재료가 좋으면 양념이 없어도 멋진 요리가 된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랜드마크' 경쟁이 벌어진 적 있다. 아방궁 같은 군청사와 지자체 크기에 걸맞지 않은 대규모 위락시설들이 앞다퉈 지어졌다. 모두 주민들 세금과 중앙정부 교부금을 쏟아 부은 시설물들이다.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눈먼 돈 잔치'에 여론이 고울 리 없다. 지자체와 어울리지 않는 급조된 축제들도 생뚱맞다. 대도시의 화려한 이벤트를 흉내 낸 소모적 행사들은 빠른 속도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전라남도 신안군(박우량 군수)은 막대한 재정지출 등 물량 공세로 지역을 알리려는 추세와 반대로 가는 지자체다.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랜드마크를 찍어내는 다른 지자체들과 달리 신안군은 섬과 갯벌과 청정한 바다가 랜드마크다. 지역을 알리기 위해 크게 손 댈 필요 없는 복 받은 자연환경을 지녔다. 재료가 좋으면 양념을 많이 넣지 않아도 훌륭한 요리가 된다.
신안을 외부에 알린 '아이디어 상품'들 중에서 1도1꽃 사업은 남도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한 대표적 히트작이다. 겨울에도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은 신안의 섬들에서 사계절 꽃축제가 열린다. 박우량 군수는 자신을 "신안을 가꾸는 정원사"라고 했었다. 신안 전체가 다도해 위에 뜬 정원인 셈. 1년 내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1004섬 신안으로 떠나보자.
3월 수선화 축제
푸른 섬에 핀 노란 수선화
선도는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51km 떨어진 작은 섬이다. 맛좋은 세발낙지가 나는 이곳을 뭍사람들에게 알린 건 수선화를 좋아한 현복순 할머니였다. 남편 고향에 정착한 할머니의 꽃밭은 20여 년 전 뭍에서 사온 두 개의 수선화 구근에서 시작됐다. 할머니가 한 개 한 개 사모아 심은 수선화가 선도의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자 신안군이 움직였다. 2018년부터 군비를 들여 섬 땅 8ha에 수선화 꽃밭을 만들었다. 할머니의 소일거리로 시작한 수선화 가꾸기가 이름 없는 작은 섬을 한국이 자랑하는 '수선화 섬'으로 바꾸었다. 선도는 2020년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됐고 2019년에 첫 번째 수선화 축제가 열렸다.
4월 튤립 축제
국내에서 가장 긴 해변에 핀 튤립
우리나라에서 백사장이 가장 긴 해수욕장은 신안 임자도 대광해수욕장이다. 임자도 서쪽에 있는 이 해수욕장은 길이 12km, 너비 300m로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1시간20분, 자전거로 30분 걸리는 광활한 백사장을 가지고 있다. 4월이면 이 백사장에서 튤립축제가 열린다. 튤립 수십 종 100만 송이가 대광해수욕장을 채색한다. 2008년 시작된 튤립축제는 임자도의 황무지와 대파를 심던 자리에 국내 유일의 튤립 구근 생산 단지를 조성해 시작됐다.
5월 라벤더 축제
프랑스 발렝솔이 부럽잖은 보랏빛 물결
박지도와 반월도의 별칭은 '퍼플섬'이다. 마을의 지붕과 다리, 작물들을 보라색으로 통일했다. 주민들 옷은 물론, 우체통, 쓰레기통, 전동차, 커피잔, 컵 등 생활도구도 보라색으로 바꿨다. 해안 산책로에는 라벤더, 자목련, 수국 등 보랏빛 꽃들을 심었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길이 1,004m의 다리를 보라색으로 칠하고, 밭작물도 보라색 순무, 콜라비 같은 것들을 심었다. 국내외 어느 지자체도 시도한 적이 없는 '컬러 마케팅'을 시작했다. CNN 등 해외 언론들은 '도박 같은 승부수'라며 극찬했다. 프랑스 남쪽 작은 마을 발렝솔과 이름 없는 일본 홋카이도 후라노를 세계적 명소로 만든 보랏빛 허브 식물 라벤더가 이제 신안의 작은 섬을 한국의 명소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6월 수국 축제 / 버들마편초 축제
여름을 알리는 수국과 1억 송이 버들마편초
도초도에는 축구장 170개(182㎢) 면적의 수국정원이 있다. 축제 때면 수국 40만 본 1,700만 송이가 관람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장관을 선사한다. 폐교를 이용해 만든 수국정원에서 2019년에 처음 열린 이후 별다른 홍보 없이 입소문으로 해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간다. 버들마편초 축제는 퍼플섬인 박지도 반월도에서 열린다. 라벤더와 함께 퍼플섬을 물들이는 버들마편초는 개화시기가 봄부터 가을까지 긴 것이 특징. 축제 때면 버들마편초 1억 송이가 장관을 이룬다.
7월 크로코스미아 축제 / 원추리 축제
애기범부채 5,000만 송이, 절경의 홍도에 노란 물결
애기범부채로 불리는 크로코스미아crocosmia는 붓꽃과인 긴 타원형의 주황색 꽃이다. 꽃에서 호랑이무늬가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7월과 8월에 꽃망울 터뜨리며, 꽃말은 '청초' '여전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국내 최대 크로코스미아 군락지인 압해도 분재공원의 3km 관람로에 주황색 꽃 5,000만 송이가 압도적인 색감으로 분재공원을 수놓는다. 홍도원추리Hemerocallis hongdoensis는 홍도 자생종이다. 옛날 홍도 사람들에게 원추리는 먹을거리와 생활용품 소재를 제공한 가결한 식물이었다. 싹과 잎은 나물, 뿌리는 전분으로 이용하면서 보릿고개를 넘었다. 홍도에서 원추리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지만 유람선을 타고 산과 바위틈에 피어 있는 자태를 감상하는 것도 운치 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노란 원추리꽃이 만발한 모습은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이다.
8월 새우란 축제
蘭 애호가들 설레는 8월
새우란蘭은 우리나라 자생종으로 뿌리줄기 모양이 새우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에서 자라지만 실내에서는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꽃이 잘 피고 꽃 색깔이 다양하면서 은은한 향기가 일품이다. 꽃은 4월에 한 번 핀다. 현재 국내 새우란은 금새우란, 한라새우란, 신안새우란, 다도새우란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신안새우란과 다도새우란은 흑산도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자은도 새우란축제 때면 전국의 난蘭애호가들로 1004뮤지엄파크가 북적댄다.
9월 아스타 축제
섬 전체가 보라색 옷을 입다
가을의 길목 9월 말 '퍼플섬' 박지도와 반월도에는 보랏빛 별이 뜬다. 아스타국화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별을 뜻하는 아스트론astron에서 유래했으며 '추억'과 '믿는 사랑'을 꽃말로 가지고 있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로 8월부터 11월까지 꽃을 피운다. 국화과의 다년초로 보랏빛 두상화頭狀花가 무리지어 핀다. 보랏빛 별처럼 생긴 겹겹의 꽃과 뾰족한 잎새가 특징. 축제 때면 32만여 그루의 아스타국화가 박지도 선착장에 도착하는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꽃과 길과 다리와 집의 지붕까지 온통 보라색 옷을 입은 '퍼플섬'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밤에 조명을 받은 보랏빛 퍼플교를 걸으면 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0월 맨드라미 축제
닭의 벼슬을 닮은 선비꽃
서양에서는 맨드라미를 '닭의 벼슬cockscomb'이라 부른다. 중국은 계관화鷄冠花, 일본에서는 계두화鷄頭花라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맨드라미는 벼슬을 의미했다. 동·서양 모두 맨드라미는 닭과 관계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병풍도에 세계 최대 규모의 맨드라미 공원이 있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맨드라미 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아기자기한 동화 같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지붕도 맨드라미 색깔 따라 모두 빨강색이다. 이제는 국내외에 너무도 잘 알려진 신안군의 컬러 마케팅 현장이다. 여름에 피기 시작하는 맨드라미는 개화기간이 120일 정도로 다른 꽃들에 비해 길어 늦서리가 내릴 때까지 꽃을 볼 수 있다.
11월 분재 축제
자연과 사람과 동물을 닮은 돌
압해도 송공산 남서쪽에 명품 분재공원이 있다. 총면적 13만7,000㎡(4만1,500평)의 이 공원에는 자연과 사람과 동물을 닮은 400여 점에 달하는 분재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이 공원에는 분재뿐만 아니라 저녁노을미술관·숲체험관·산림욕장 등 볼거리가 쏠쏠하다. 관람시간은 3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 9시~오후 6시, 11월부터 2월까지는 오전 9시~오후 5시.
12월~1월 애기동백 축제
흰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빨간 꽃잎들
12월에 천사섬 신안에 가면 귀여운 애기동백들을 만날 수 있다. 애기동백은 동백나무의 사촌이다. 동백은 1월 중순을 넘겨 피기 시작하고 애기동백은 늦가을부터 꽃망울을 맺는다. 애기동백은 빨리 피지만 동백나무보다 늦게 꽃잎을 떨군다. 동백꽃은 꽃잎이 수줍은 듯 완전히 열리지 않지만 애기동백꽃은 거의 완전히 개방되는 것이 특징. 신안 앞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압해도 송공산(230m) 기슭에 1004섬 분재공원이 있다. 400여 점에 달하는 분재 작품들과 미술관과 산림욕장을 갖춘 이 공원의 겨울 주인공은 애기동백이다. 흰 눈을 소복이 덮어쓴 2만여 그루의 애기동백꽃 4,000만 송이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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