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강요 왜 신고 안 했나”…‘피해자다움’ 물은 한국 수사·사법기관
유엔 “형사사법제도에 의해 2차 피해도 입어”
‘유흥업소 사장이 압수해 갖고 있던 피해자들의 여권, 거기에 찍힌 예술흥행(E-6) 비자. 사장에 대한 피해자들의 두려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가수로 활동하겠다고 한국에 왔다가 성매매 혐의로 적발돼 강제퇴거(출국)·보호(구금) 명령을 받은 필리핀 여성 3명이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한 인신매매 피해자’로 볼 만한 요소가 많다며 이런 근거들을 들었다. 위원회의 결정문을 보면, 당시 경찰관과 출입국관리소(현 출입국·외국인청) 공무원 등은 해당 사항을 모두 인지하고 있던 상황.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피해자들에게 강압적인 환경에서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한국 수사·사법기관은 성매매 단속에서 수사, 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얼마나 피해자다운가’만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댔다.
유엔의 결정문 등을 보면, 세 여성은 2014년 ‘외국 연예인 비자’로 불리는 예술흥행(E-6) 비자를 취득해 한국에 왔다. 하지만 공연기획사가 이들을 데려간 곳은 외국인 전용 클럽이었다. 피해자들은 공연을 하는 대신 클럽에서 남성들에게 성적 향응을 제공하는 일을 했다. 클럽 사장이 여권을 빼앗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한국에서 추방당할 것’이라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월~목요일 오후 1시부터 4시30분까지만 외출이 가능했고, 손님이 몰리는 금~일요일에는 아예 외출 금지였다. 사장은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여성들을 때리거나 추행했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사실상 감금 상태에서 성 착취, 임금 착취를 당한 것이다.
피해자들은 그런데도 2015년 3월 경찰의 성매매 단속에서 적발됐을 때 “성매매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사장이나 누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라고 진술했다. “사장이 무서워서 첫번째 조사에서 거짓 진술”을 한 것이다. 피해자 중 한 명이 한 달 뒤 2차 조사에서 “(사장이) 양주 술잔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손바닥으로 몸을 때리며 ‘유사성행위를 하지 않으면 클럽을 나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을 번복했지만, 경찰은 이에 대해선 추가 조사를 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은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그대로 나와 있다.
경찰은 이미 클럽 단속 당시 사장이 피해자들의 여권을 빼앗아 갖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한 터였다. 게다가 유흥업소들이 이-6 비자를 받고 온 외국인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알선·강요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강압적 성매매가 이뤄졌을 가능성에 대해선 조사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성매매처벌법 및 출입국관리법 위반(체류자격 외 활동) 혐의를 적용했다. 피해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로 보내졌고, 이후 강제퇴거명령과 보호명령을 받아 화성외국인보호소에 45일간 감금됐다.
검찰도 피해자들의 성매매가 강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검찰은 ‘피해자들이 업무시간 외에 외출을 할 수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각자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었는데도 경찰 단속 전까지 외부에 항의 표시를 한 사실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피해자들에게 성매매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서울행정법원은 피해자들이 사장의 성매매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이를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원고들(피해자들) 역시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사장의 성매매 요구에) 묵시적으로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들이 제기한 강제퇴거 명령 취소 청구를 2017년 7월 기각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김종철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수사기관 등이) 피해자에게 ‘천상의 피해자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강요에 의한 성매매로 보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피해자들에게 ‘왜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하지 않았냐’는 전제를 깔아 2차 피해를 유발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위원회도 “(피해자다움에 대한) 경찰 및 법원의 고정관념이 작용해 여성들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피해자들은 형사사법제도에 의해 2차 피해도 입었다”고 지적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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