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외칠 줄 모르는 ‘거수기 이사회’… “책임 의식 높일 필요” [심층기획-20년 제자리 ‘K디스카운트’]

이도형 2024. 2. 2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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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기업 이사회가 앞장서야
상장기업 의사결정 주도해야 하지만
사주일가 등 대주주 입김에 좌지우지
연간 공시기업 안건 반대 0.7%에 불과
상법 개정해 책임범위 확대 제언 나와
사회적 합의 통한 독립성 강화 요구도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급선무

99.3% 찬성. 공정거래위원회가 2022년 5월∼2023년 4월 1년간 대기업(자산규모 5조원 이상인 73개 공시 대상 기업집단) 소속 309개 상장회사 이사회 안건 7837건을 조사한 결과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은 55건에 그쳤다. 이들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가 1년간 경영진이 올린 안건 중 단 0.7%만 반대한 셈이다. 이 중 사외이사가 반대한 안건은 16건, 전체의 0.2%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시장 저평가)의 대표적 원인 중 하나는 단연코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다. 상장기업의 의사 결정은 이사회가 주도해야 하지만, 국내에선 사주 일가 등 ‘대주주’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주주가 없어도 경영진 의견대로 의결하는 ‘거수기’ 노릇에 충실하다는 지적이 적잖았다.

금융당국이 여러 차례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소액주주 운동을 중심으로 상법 조항 개정을 통해 이사회의 책임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제도는 갖췄지만, 시장 신뢰는 낮아”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지난 1월부터 포스코홀딩스의 ‘호화 해외 이사회’ 관련 의혹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해 8월 캐나다에서 해외 이사회를 열었는데, 7억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출했다. 이 비용을 사규에 따라 포스코홀딩스가 집행해야 하지만 자회사인 포스코와 캐나다 현지 자회사 포스칸이 나눠서 집행했다는 것이 의혹의 뼈대다. 포스코그룹은 당시 차기 회장 선출을 진행 중이었는데, 해외 이사회에 참석했던 사외이사들은 차기 최고경영자(CEO) 후보 추천위원회 소속이라 공정성 논란까지 일었다.

포스코와 같이 국내에서 대표적인 ‘주인 없는 회사’로 일컬어지는 금융권에서도 이사회의 독립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지난해 KB·신한·하나·우리·농협·BNK·DGB금융지주 이사회가 다룬 안건 가운데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주인’이 있는 기업 이사회의 독립성은 더욱 의심된다. 이사회의 결정 중엔 소액주주들에 피해를 끼치는 사례가 속속 불거졌었다. 2020년 LG화학은 배터리 사업부를 물적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으로 LG화학의 소액주주들은 주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카카오는 카카오뱅크·카카오게임즈·카카오페이를 ‘쪼개기’ 상장했다 ‘국민 밉상주’로 불린다. 이사회는 기업의 경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주가 폭락으로 큰 손해를 본 소액주주들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그간 자산 2조원 이상인 기업에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하는 등 지배구조 개선 및 소액주주 보호책을 잇달아 내놨으나 실효성을 따지자면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자본시장연구원 김준석·강소현 연구위원이 지난해 6월 펴낸 ‘코리안 디스카운트 원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17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소액주주보호’ 항목에서 한국은 190개국 중 17∼23위였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글로벌 경쟁력 지수(GCI)의 기업지배구조 항목에서는 140개국 중 100∼116위에 그쳤다. 보고서는 “세계은행의 지표는 공시 의무, 이사회 의무, 주주 소송 용이성, 주주 권리, 소유 및 지배구조, 기업 투명성 등에 대해 법률상 규정 존재 여부와 규제 강도를 평가하고, WEF의 지표는 소액주주보호, 이사회의 유효성, 기업의 윤리적 행동 등을 경영자 설문조사를 통해 평가한다”며 “한국은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된 법제도는 잘 갖춰진 반면 법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거나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시장 신뢰가 낮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사회에 책임 의식 더 심어야’

이러다 보니, 기업 이사회에 대주주가 아닌 주주 전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더 심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대표적인 주장이 상법 개정이다. 현행 상법 382조의 3은 이사로 하여금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주주를 위해’까지 반영하자는 주장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은 2022년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일단 법무부는 당분간은 이 같은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추진하지 않기로 한 상태다. 구상엽 법무실장은 최근 “주주보호 취지에는 적극 공감하나 이런 규정이 생기더라도 추상적이고 선언적 규정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실무자의 근본적 고민”이라고 설명했다. 선언적 규정만으로는 이 조항을 근거로 이사회의 잘못된 판단에 손해배상을 물어도 실용성이 없으니,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이에 대해 이 의원 측은 “해당 조항은 추상적 조항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재판의 결론을 좌우하는 핵심조항”이라고 반박했다.
법 개정까지 시간 소요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사회적으로 ‘이사회 독립성 강화’ 합의를 추진하자는 시각도 있다. 강성부 KCGI 대표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국거래소의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가이드라인 등 연성규범 개정을 중간단계로 상정했다. 연성규범이란 공공 기관 또는 사적 기관이 선언한 기준이나 원칙으로 구성원의 합의에 따르며, 법률과 같은 구속력은 없지만, 사회적 합의를 기초로 한다. 최근 안효섭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장이 한국거래소의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가이드라인에 소액주주보호를 위한 이사 책임 규정 및 이사회의 주주에 대한 책임을 반영하자고 제안한 것도 연장선상이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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