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4년 다음해 1962년으로 바뀐 통지표, 새 학년은 한 달 빨라졌다
독자들의 보물에 새겨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연대별로 돌아본다. 1960년대는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이 잇따라 일어났고, 외부적으로는 북한과의 체제 대결이 본격화되면서 ‘반공’이 강조된 시기였다. 그 가운데서도 6·25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해 경제 발전에 나서고 교육을 비롯한 제도를 정비하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혁명과 군사정변 이어진 격변기
“서글프다고나 할까요, 이 나라 앞날 말입니다. 정치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않는다 하면서도 현상을 이렇게 눈으로 보는 이상 무관심할 수만도 없구려.”
대통령·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1960년 3월 5일 중앙대생 김태년(약학)이 친구 A씨에게 보낸 편지에는 청년의 고뇌가 묻어난다. 야당에서 자유당의 선거 공작 문건을 폭로하고 공명 선거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던 때였다. 그는 한 달 뒤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희생된 중앙대 여학생 서현무(법학)와 사후 영혼 결혼식을 올리고 국립 4·19 묘지에 합장된 사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시국에 대한 걱정 외에, 등록금 마련을 위해 소를 팔기 전날 “쇠죽이라도 많이 먹고 가라고 듬뿍 퍼 줬다”는 또다른 편지는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을 낳았던 농가의 형편을 보여준다.
편지를 투고한 독자 김정일(84)씨는 생전 김태년·서현무 열사와 친분은 없었지만 4·19에 참여했던 중앙대 출신으로서 두 사람의 묘소를 돌봐왔다. 이 사연을 보도한 본지 기사(2015년 4월 17일 자 A23면)를 보고 수취인 A씨가 편지를 김씨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김정일씨는 “A씨가 건강 문제로 편지 관리를 부탁해왔다”고 말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내세운 ‘혁명 공약’의 첫 번째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강북구 독자 조이성(83)씨 부친 조병진씨가 집필한 ‘우리는 속아서는 안 된다’는 북한의 대남 간첩 사건 사례를 소개한 책. 조병진씨는 6·25 시기부터 육군 방첩 부대에서 근무했다. 방첩이 “자신의 생명재산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며 나아가 대한민국의 영원한 안전과 전 자유진영의 안전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강조한 머리말에서 6·25 이후 남북의 체제 대결이 심화되던 시대상이 드러난다. 책 뒤표지에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1961년 5월 25일 자 ‘군검필’ 도장이 있다.
◇'재건’ 앞세워 경제발전 시동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출범했다. 이후 ‘재건’이라는 구호가 모든 곳에 등장했다. 경기 시흥시 독자 윤병국(80)씨가 재건국민운동 경기도지부에서 받은 농촌 청년학교 수료증은 국가적 국민 계몽 운동이 ‘재건’의 이름으로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윤씨는 “농한기에 청년 100여 명을 모아 일주일 정도 집체 교육을 했다”면서 “그때까지도 재래식 농법 위주였던 농촌에서 현대식 농법 등을 가르쳤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서울 도봉구 독자 이계섭(69)씨의 부모님은 ‘재건 가계부’를 썼다. 이씨는 “근검절약을 실천하기 위해 정부에서 전국에 보급한 것 같다”면서도 “당시 궁핍했던 농촌 현실을 감안할 때 가계부가 얼마나 유용하게 쓰였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가계부는 ‘조모님 초상’ ‘부친 회갑’ 같은 경조사의 부조금 기록부로 쓰였다. 계란 1줄, 당목 두루마기 1벌, 밤 2되 등의 내역은 주로 현물로 부조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강원 춘천시 독자 박정옥(64)씨 부친 박충원씨는 육군 공병 장교를 거쳐 강원 정선군 함백광업소 공무과에서 근무했다. 1963년 10월 12일 “ICA 시범주택 준공식을 기하여 짧은 시간내에 계획된 일을 침착정연히 처리”한 공로로 대한석탄공사 총재의 표창장을 받았다. 그해 함백광업소에는 미국 국제협력처(ICA) 원조 자금으로 사택 500가구가 건설됐다. 박정옥씨는 “아주 어렸을 때 탄광촌에서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주신 그네를 형제들과 옹기종기 타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당시 ICA 원조로 지은 주택은 ‘ICA 주택’,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원조로 지은 주택은 ‘운크라 주택’이라고 불렀다. 외국 원조 기관의 이름이 그대로 주택 이름이 됐다.
지난 2001년 발행된 대한석탄공사 50년사에 1963년 ICA 사택 준공 당시의 사진이 실려 있다. 직원·가족들로 행사장이 가득 찬 사진은 대한민국 석탄 산업 전성기의 한 장면이다. 50년사에 따르면 1956년 181만t이었던 석탄 생산량은 1967년 1244만t으로 늘었다. 5·16 직후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에너지 자급자족과 석탄 증산을 중점 목표로 삼은” 결과였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에너지를 석탄 증산으로 자급자족하고, 장작과 숯 등 신탄(薪炭) 연료를 단계적으로 대체해 산림녹화를 이루자는 계획이었다.”
◇1962년 ′단기’를 ‘서기’로, 새학년은 3월
1960년대는 지금까지 통용되는 여러 제도가 처음 시행된 시기였다. 강원 영월군 독자 원장희(72)씨가 영월 무릉국민학교에 다니며 받은 통지표에선 1962년부터 단기(檀紀)에서 서기(西紀)로 바뀐 연호 표기를 볼 수 있다. 3학년 통지표에는 ‘단기 4294년도’라고 표기돼 있지만 이듬해 4학년 통지표에는 ‘서기 1962년도’라고 표기법이 바뀌었다. 연호를 바꾼 것은 세계의 표준을 따르기 위한 결정이었다. 새 표기법 시행을 앞둔 1961년 말 정부는 “서기가 지닌 초국가적 기호로서 세계성에 우리의 공감을 표시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진취성을 제고하자는 결정”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독자 권국진(71)씨의 경주 황남국민학교 수업증서에는 1학년 과정을 수료했다는 내용과 함께 ‘단기 4294년(1961년) 3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1961년까지 4월에 새 학년이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학제는 5·16을 거쳐 다음해인 1962년부터 3월 새 학년으로 바뀌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시점은 미군정 시기엔 9월이었고, 1949년 교육법 제정 이후 4월로 바뀌었다. 박정희 정부 들어 1~2월 혹한기에 방학을 해서 월동비를 줄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이를 다시 3월로 바꿨다. 2020년 코로나 때문에 예외적으로 개학이 4월로 늦춰진 적이 있지만 ‘3월 개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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