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게임, 인지장애 치료제가 되다[의학카페/강동화]
‘뇌가 먹는 약’ 디지털치료제 SW 주목
몰입 높이는 게임, 인지기능 개선 효과
국내선 불면증 치료제 허가받아 처방… 난치병 치료 도움 될 신약 개발도 기대
인간은 놀이를 즐기는 존재라는 의미의 ‘호모 루덴스’라 불리기도 한다. 출퇴근길에 많은 사람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비디오 게임에 빠져 있는 지하철 안 풍경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런데 만약 이런 비디오 게임을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약’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바로 차세대 신약으로 불리는 ‘디지털 치료제’로 질병을 치료, 관리, 예방하는 목적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그 형태는 앱, 가상현실, 게임 등 다양하며, 특정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질병에 대한 치료 효과가 뒤따라온다. 디지털 치료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뇌가 먹는 약’이라 할 수 있겠다.
디지털 치료제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새로운 산업이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2년 약 5조2000억 원에서 연평균 20.5%씩 성장하여 2030년에는 약 23조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치료제는 시간, 공간, 인력 가용성 등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대두되었고, 특히 비대면 치료의 필요성이 높았던 코로나19 펜데믹 기간 동안 관심이 증대하였다.
이 밖에 현재 국내에서 허가용 임상시험 중인 디지털 치료제의 주요 대상 질환을 살펴보면 인지장애,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알코올이나 니코틴 중독, 주의력결핍장애, 자폐스펙트럼장애, 발달장애, 호흡재활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대부분의 디지털 치료제는 스마트폰이나 패드에서 구동되는 앱의 형태를 띠며, 드물게 가상현실(VR) 환경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들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디지털 치료제의 또 다른 형태가 바로 비디오 게임이다. 게임은 인간이 여가 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활동 중 하나다.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비디오 게임에도 긍정성과 부정성이 공존하지만,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다. 소위 좋은 비디오 게임은 시공간 지각력, 감각-운동 협응 능력, 전략적 사고, 자기 통제 능력 등 인지 기능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인지 기능을 개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게임들은 대부분 인지과제 중심으로 구성된 기능성 미니게임의 형태였다. 한편 서사 구조를 가진 어드벤처나 미스터리 장르의 비디오 게임은 재미와 몰입도를 높이므로 인지 기능을 조절하는 과제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면 매우 훌륭한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이 분야에서는 미국 아킬리사(社)가 가장 앞서 있는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아동의 주의력을 향상시키는 디지털 치료제 게임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승인받아 의료 현장에서 처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어드벤처 비디오 게임의 경도인지장애 개선 효과를 검증하는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치료제가 기존 치료법이 없는 질환이나 장애를 개선하는 것도 가능할까? 국내외에서 개발 중인 디지털 치료제는 기존 약물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혁신 신약(First-in-Class)급 디지털 치료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상황이다.
국내에서 디지털 치료 신약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도전이 진행되고 있다. 그 치료 대상은 바로 뇌졸중으로 인한 ‘시야장애’다. 시야장애란 시각피질인 후두엽의 손상으로 앞에 놓인 세상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결손을 말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아직 효능이 검증된 치료법이 없다. 국내 연구진은 시지각 학습 이론에 기반하여 VR 환경에서 환자 맞춤형 시지각 훈련을 제공하는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했다. 시지각 학습은 시각 자극에 대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자극에 대한 지각이 향상되는 현상으로, 정교한 맞춤형 시각 자극 훈련이 뇌졸중 병변 주변의 잠자는 뇌를 깨워 시지각 기능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작동 원리이다.
기존 치료법이 전무하다 보니 이 치료에 대한 환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웹사이트에 게시된 임상시험 프로토콜을 본 후 연구에 참여하겠다는 해외 환자들도 상당 수 있었다. 디지털 치료제가 기존 치료를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난치병을 극복하는 혁신 신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의약품에 비해 부작용이 거의 없고, 개발과 임상시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적다. 또한 사용자 경험과 데이터를 활용해 빠르게 개량신약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하다. 물론 모든 앱이나 게임이 쉬이 치료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치료기전이 분명해야 하고 임상시험을 통해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하여 식약처 인허가도 받아야 한다. 의약품도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으로 나뉘고 이와 별개로 건강기능식품이 있듯이, 디지털 치료제도 웰니스 제품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디지털 치료제가 전문의약품이라면 웰니스 제품은 건강기능식품이 되겠다.
디지털 치료제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아직 태동기라 할 수 있고 임상 현장에 안착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 모두에게 낯선 형태의 약이 출현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의 미충족 수요를 디지털 기술로 치료하려는 접근이므로 의료와 정보기술(IT)이 강한 우리나라가 글로벌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만한 분야라 생각한다. 정부 부처와 병원, 의료진, 기업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약 대신 게임을 처방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강동화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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