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위한 큰 이야기 던지는 정치
“한나라당과 민주당,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2004년 3월 민주노동당 노회찬 비례대표 후보의 말)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본궤도에 오른 진보정치는 2004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13.03%의 득표율(비례)을 기록한 뒤 꾸준히 10% 안팎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런데 최근엔 정의당·진보당 등의 지지율이 각각 1%에 머문다는 여론조사 결과(한국갤럽 2024년 2월 첫째 주)가 나오기도 했다. 2006년 일심회 사건,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등 그간 큰 고비들도 의지와 열정으로 돌파해온 뚝심을, 다가오는 2024년 4월 국회의원선거에서 또 한번 발휘할 수 있을까. 수십 년 기득권 양당 정치에 시원한 견제구를 꽂아오던 진보정치의 매서운 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기후위기 대응, 노동, 젠더 등 우리 사회가 더불어 지속 가능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공약을 한 보따리 안은 대표 주자들을 <한겨레21>이 잇달아 만나본다. ―편집자
2024년 2월2일 오전 제주시 일도이동 선거사무소에서 첫 주자로 제주시을 지역구에 출마하는 ‘제주 2세대 진보정치인’ 강순아(39) 녹색정의당 후보를 만났다. 강 후보는 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로 일해온 돌봄노동자이자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 그리고 진보정당·시민단체에서 활동한 운동가다. 그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이렇게 매일 땀 흘려 일하는데 왜 우리 집은 늘 가난할까. 부모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문제 아닐까. 이런 질문을 좇다 정치를 시작했고 이번에 출마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땀 흘려 일해도 왜 늘 가난한가
―유권자를 많이 만날 텐데 어떤 얘기를 하나요.
“거대 양당의 대결정치가 극단적으로 표출되기 때문일까요? 많은 분이 ‘제발 그만 좀 싸우라’는 말을 하세요.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너희들(정치인들) 이익 위한 싸움 좀 그만하라는 소리더라고요. 선거 때는 무엇이든 실현하겠다고 하는데, 당선되면 ‘정치인 자신의 이익이 아닌 우리(유권자)를 위한 정치를 하는 건가’ ‘정치의 효용성을 못 느끼겠다’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서 저는 ‘싸우려면 국민을 위해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대 양당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민’에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민’인지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노동자·농민·사회적 약자 같은 평범한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법조인·지식인 등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정치하는 구조 같습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려면 선거 때 말고 평상시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진보정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출마하면서 제주 진보 정치의 역사에 대해 되짚어봤습니다. 여성 농민 출신으로 제17대 국회의원이었던 현애자 의원(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당선)이 있습니다. 또 강경식·김혜자·허창옥·고은실 (제주도) 의원들이 제주 진보정치인으로 거론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현안을 주도하고 주민 뜻을 모아내면서 문제를 해결했고, 자연스럽게 정치에 진출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이분들 정치의 효용성은 피부에 와닿는 것이었습니다. 현애자 의원은 교통약자 이동지원법 제정을 주도했어요. 그래서 저상버스가 도입됐어요. 그리고 제가 아이를 낳고 유모차로 저상버스를 탑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어요. 암환자 자기부담률이 낮아졌어요. 저희 어머니가 암에 걸렸는데, 정말 뼈저리게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어요.
농민 출신인 김혜자 의원 주도로 ‘여성농어업인육성지원조례’(제8조 관련 각종 위원회의 여성 농어업인 위촉 비율을 40% 이상으로 한다)가 전국 최초로 주민에 의해 발의됩니다. 농사에서 실질적 역할을 하지만 항상 부수적인 위치로 밀렸던 여성농민을 제대로 대우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죠. 허창옥 의원이 활동할 땐 마늘값 폭락이 큰 문제였어요. 농민 입장에서 마늘값 안정을 위해 국가·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장치를 마련해 나갔어요. 이렇게 유권자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권자를 만나보면 진보정치인이면 과감하게 (공약을) 던질 것은 던지고 ‘큰 이야기’를 해달라는 얘기를 합니다.”
막개발 멈추고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하자
―큰 이야기라고요.
“개헌해 제7공화국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많이 변했는데 헌법이 잘 못 따라오는 상황인 거 같아요. 이를테면 기후위기 대응 같은 내용이나 생태적 전환을 할 때 불평등이 반드시 타파돼야 한다는 점, 돌봄 사회를 수립하는 목표 등을 헌법에 새로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교육·의료·주거·교통 등을 시민의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국가가 공공성을 강화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담겨야 합니다. 아울러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는 방안 등도 녹색정의당 내에서 공유하는 고민입니다.”
―제주 난개발 문제는 제주도민뿐 아니라 전 국민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문제입니다. 가장 큰 현안은 제2공항 건설 문제일 것 같습니다.
“제2제주공항 관련 전략환경영향평가에서 철새 등 동식물에 대한 조사부터 제주 식수 공급원인 숨골 조사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습니다. ‘군사공항이 목적이면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혔던 현 오영훈 도지사도 의혹이 해소된 게 없음에도 발을 빼는 모양새예요. 주민투표도 하지 않고 주민 의견도 묻지 않고요. 또 관광객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하는 목적도 마찬가집니다. 제주가 어떤 가치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도민들의 제대로 된 논의가 없었어요. 그게 가장 답답하죠.
제주 곳곳에서 이런 난개발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년 전 (찻길을 넓힌다며) 비자림로의 수천 그루 나무가 함부로 베어진 장면은 충격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디까지 자연을 해치면서 살아야 하느냐는 화두를 던져줬어요. 곶자왈(숲) 같은 곳도 제주의 허파 구실을 하는 곳임에도 개발에 노출돼 있어요. 일회용품을 쓰던 개념과 습관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대로 다 적용되는 것 같아요. 일회용품이라는 게 우리가 쉽게 접하고 쓸 수 있고 돈만 주면 살 수 있잖아요. 자연을 그렇게 대하는 거죠.
대규모 개발, 막개발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광도 제대로 된 생태관광으로 바뀌어야죠. 이미 대규모 관광지나 아파트 단지는 생길 만큼 생겼거든요. 더 이상의 난개발은 도민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해요. 엉터리 조사 말고 제대로 조사해서 제주 땅이 지금의 쓰레기와 오·폐수를 감당할 수 있는지, 제대로 된 환경자원총량제(개발하더라도 현시점 기준의 천연자원 보전 비율을 똑같이 유지하는 것)를 실시하고 이를 위한 실태조사가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제주 곳곳에 있는 습지 같은 곳만 해도 제대로 조사가 안 돼 있어요.”
어르신 살던 지역이 돌봄 서비스 공간 돼야
―후보자와 같은 돌봄노동자를 코로나19 시기엔 필수노동자라 해서 재인식돼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려다 윤석열 정부 들어 아예 논의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투명인간’이라는 말을 썼는데, 제주에는 정말 그런 분이 많아요. 저만 해도 요양보호사로 일했지만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도 같이 챙겼고 그러면서 아이도 챙기죠. 한 사람의 노동자 역할을 하면서 사회를 지탱하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도 제주의 임금은 너무 낮아요. (국세청 근로소득 신고현황을 보면 제주도민의 2020년 기준 1인당 연급여액은 3270만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다.) 그런데 관광객 눈높이에 맞게 물가는 되게 높고요. 그러니 제주 청년들은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서 제주에서 살지 못하고 빠져나가죠. 사회를 지탱하는데도 임금은 살아가는 데 못 미치죠.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을 비롯해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지위를 높여주고 그 가치를 상승시켜주는 기반을 만드는 데 이제부터라도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돌봄노동자로 일하셨는데, 돌봄 현장에 대해 좀더 소개해주세요.
“어르신 유권자를 만나면 ‘요양원 가기 싫다’ ‘그냥 이 동네에서 이웃들과 살다가 죽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하세요.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는 중앙이나 지방정부가 맡되 그 공간은 지역이 돼야 합니다. 마을에 돌봄 센터를 세우고 거기서 일자리를 만들어내 담당하도록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요.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간호하다가 동반자살을 하는 일까지 종종 생깁니다. 저는 이게 돌봄을 개인에게 맡기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으로 찾아가 일부 도움을 주는 방식도 필요하지만, 지역에서 이웃들과 문제를 꺼내놓고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공동체까지 다시 생길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젊은층에 은둔형 외톨이도 많잖아요. 결국은 이 문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합니다.”
농산물 목표가 공시·청년 임대주택 정책 추진
―의원이 되면 추진할 주요 공약을 말씀해주세요.
“농산물 생산 원가 조사로 현실에 맞는 목표가격을 설정해 이에 미달하면 차액을 보전하는 ‘농산물 목표가격 보장 법안’, 그리고 자가용을 줄이고 대중교통 이용을 늘릴 수 있도록 ‘월 만원대 교통 프리패스제’를 도입하려 합니다. 또 청년 주거권 보장을 위해 ‘10만원 청년 임대주택’을 실현하고, ‘5명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 예외 조항을 폐지’하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마을마다 돌봄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주요 공약입니다.”
제주=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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