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플랫폼 정당, K스타일

기자 2024. 2. 1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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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을 앞두고 지금 K스타일 플랫폼 정당은 아예 정당을 통째로 들여다 앉히는 거대 플랫폼으로까지 진화하였다.
최대 문제는 ‘강령’으로서의 플랫폼 정당의 실종이다. 미래 비전을 그려내고 실천 방침을 구체적 제시하는 논의는 또 기대난망이다.
오로지 의석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데 어떤 행보가 유리한가를 따지는 개인과 집단의 정치공학만 요란할 뿐이다.

지난 총선 정도부터 ‘플랫폼 정당’이라는 말이 무슨 신박한 정치 혁신이라도 되는 듯 떠돌기 시작했다. 거대정당 군소정당 진보정당 보수정당 모두가 ‘플랫폼 정당’을 자칭하거나 지향한다고 표방하였다. 특히 지난번 총선에 도입된 K스타일 ‘준연동형 비례제’와 맞물려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무슨 미사여구로 어떻게 포장하든, 무슨 외국의 예를 끌고 와 어떤 논리를 풀어놓든 나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저 6공화국 대의제 정치의 한없는 추락의 증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추락을 스스로 추락이라고 받아들이고 고쳐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이 추락을 추앙하면서 미래로 삼자고 이야기하는 ‘메타인지’ 마비의 증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플랫폼 정당’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든가 형용모순이든가 둘 중 하나이다. 먼저 동어반복으로서의 ‘플랫폼 정당’의 경우를 보자. ‘강령’으로 번역될 때가 많은 이 플랫폼은 바로 근대 혹은 현대 정치에서 정당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미 존재하는 혹은 앞으로 조직하고자 하는) 정치 집단이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는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어떠한 미래를 만들려고 하는지, 그래서 구체적인 실천 항목들이 어떤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것을 ‘플랫폼’이라고 했다. 흔히들 근대 정치 최초의 ‘플랫폼’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선언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등을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당이란 곧 플랫폼이며, 플랫폼은 곧 정당이다. 플랫폼이 없는 정당은 ‘도당’ 즉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모여든 추한 떼거리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플랫폼이라는 말을 이런 뜻으로 사용했을 때는 정당이라는 말을 따로 붙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한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21세기 초입에 쓰이고 있는 플랫폼이라는 말이 그런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올 만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도 확실하게 정의하지도 또 정의하려 들지도 않은 채 모두가 쓰고 있는 이 말은, 기실 21세기 ‘플랫폼 자본주의’의 플랫폼을 뜻한다. 즉 스스로를 상품으로 판매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와 사건 사실 등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도톰한 발판’, 즉 플랫폼 (plat-form)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플랫폼 정당이란,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당선되어 각종 공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개인 및 집단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모여들어 있는 군집을 말한다. 약간 시니컬한 이름을 붙이자면 ‘정치 쿠팡’ ‘선거 알리바바’쯤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군집은 근대적 현대적 정당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정당과는 정반대 성격의 집단인 ‘도당’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의 플랫폼 정당이란 형용모순이 되어 버린다.

전 세계가 정당 강령의 혁신 정체

그런데 어째서 이 두 번째 의미의 플랫폼 정당이 생기게 된 것일까? 첫 번째, 역설적이지만 그 강령으로서의 플랫폼이 무의미해지거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정당의 강령이란 회사나 협동조합을 만들 때의 정관 정도로 그저 ‘표준적인’ 혹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문안을 그저 단어와 문장 몇개 바꾸거나 손질하는 끼워넣는, 정당 구성의 고식적인 요건 정도로 전락하였다. 강령을 가지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거나 선거를 앞두고 강령을 대대적으로 국민들에게 선전한다는 고전적인 정당들은 이제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강령은 본래 그런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선거 때마다 새롭게 바뀌는 역동적인 것이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답답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에서 산업과 사회를 선도하는 국민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20세기 초중반의 25년 동안 강령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진보’니 ‘민주’니 ‘녹색’이니 하는 열쇳말 하나 정도로 정당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 어느 나라라 할 것 없이, 이 정당 강령의 혁신은 정체 상태를 맞게 된다. 그때부터 정당들의 정체성도 모호해진다. 진보정당이라고 해봐야 ‘실용’을 강조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보수정당들도 ‘포용’을 내세우며 각종 재분배 정책을 대폭 수용한다. 녹색 좌파 정당들은 ‘현실 정치’를 내세우며 기성 정치 세력과 급속히 동일해진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보편성에 한국 정치의 특성이 더해진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입된 이른바 준연동형 비례제라는 것은 사실상 위성정당이라는 것을 제도적으로 안착시키고 말았다. 구체적인 지역에 들어가서 만만치 않은 상대 후보와 피튀기는 백병전을 벌여야 하는, 그래서 승패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지역구와 달리, 언론 매체 등 이른바 공론장의 ‘공중전’만 적당히 치르고 적당한 명분만 내세운다면 최소한 의석 몇개는 노려볼 수 있는 비례 의석에 특화된 정당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의회 진출의 야심을 가진 개인과 집단들이 몰려든다. 본래 ‘야심 찬(ambitious)’이라는 말은 로마 시대에 공직에 선출되고 싶은 개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행태를 일컫는 말이었다.

역량 부족해도 줄만 잘 서면 ‘배지’

이러한 개인과 집단들은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정치 네트워크와 정당들을 슬슬 돌아보면서 쇼핑을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기회가 올 법한 쪽으로 잽싸게 줄을 선다. 이것이 지난 4년간 나타난 K스타일 플랫폼 정당의 진면목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지금 K스타일 플랫폼 정당은 개인들의 플랫폼이 아니라 아예 정당을 통째로 들여다 앉히는, 그래서 선거 때마다 이런저런 정당들을 ‘선거 연합’이라는 속 빈 명분 아래에 몰아넣는 거대 플랫폼으로까지 진화하였다. 어떤 현상을 두고 그것이 시대의 자연스러운 변화인지, 거부해야 할 퇴보인지를 총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만큼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그렇게 해서 플랫폼 정당에 발돋움하고 선 개인들이 어떤 인물들인지를 국민들이 선별하고 검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멀어졌다는 것이다. 복잡한 하청, 재하청 관계처럼 복잡해진 이 플랫폼 정당 체제에서는 실로 역량과 자질이 부족한 인물들이 줄만 잘 서면 얼마든지 배지를 달 수 있다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는 것을 20대 국회가 잘 보여준 바 있다. 둘째, 6공화국 양당 체제의 온존 강화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1987년 6월 항쟁의 산물인 6공화국 체제에 갇혀 있으며 그중 제일 심각한 문제가 망국적 지역 감정, 서로가 발목을 잡는 ‘비토크라시(veto-cracy)’로 점철된 의회의 특권화와 무능화, 국민적 패싸움에 가깝게 전락한 망국적인 양당 정치 등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 개혁의 방안으로 나왔던 선거 제도 개혁이, 오히려 모든 군소 정당들로 하여금 강령이고 뭐고 그냥 양대 정당 중 하나의 플랫폼에 올라서도록 만들어 양당 정치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강령’으로서의 플랫폼 정당의 실종이다. 저성장과 인구위기를 위시하여 각종 위기가 덮쳐오는 이 변화의 시대에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어떻게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그려내고 그것을 내올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논의는 이번 총선에서도 기대난망이다. 오로지 비례 후보 제도를 빌려 의석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데에 어떤 행보가 유리한가를 따지는 야심 찬 개인과 집단들의 정치공학만 요란할 뿐이다. K스타일 플랫폼 정당. 어쩌면 국제적으로 수출이 가능한 미래적인 정치 상품인지도 모르겠다.

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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