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정치인의 신발
운동화는 젊은층에게는 패션이지만, 정치인에게는 소탈함과 친근감을 드러낼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공식 선거운동 출정식 날이면 정장 차림의 후보들이 하나같이 운동화를 신고 시장에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종종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자선 행사장 등에 모습을 드러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가끔 뉴발란스 스니커즈를 신고 순방에 나섰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운동화를 이용한 이미지메이킹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값비싼 취향의 명품 구두 애호가로 유명하다. 그가 즐겨 신는 신발은 구찌와 존롭(John Lobb)의 럭셔리 구두이며, 190㎝의 거구이면서도 더 크게 보이고 싶은 것인지 때로는 안창을 두껍게 깐 ‘엘리베이터 구두’를 신기도 한다.
그랬던 트럼프 전 대통령마저 운동화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초상권을 활용해 머그컵과 티셔츠 등 ‘굿즈’를 판매해 큰 수익을 올린 그가 이번에는 ‘트럼프 스니커즈’를 출시한 것이다. 전체가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성조기 장식과 트럼프의 이니셜인 ‘T’가 새겨져 있는 이 스니커즈는 웹사이트에서 켤레당 399달러(약 53만원)에 판매가 시작된 지 두 시간 만에 완판됐다고 한다.
트럼프가 세계 최대 규모의 스니커즈 박람회인 ‘스니커콘’에 참석해 자신이 론칭한 운동화 홍보에 나선 지난 17일(현지시간)은 부정 사기 대출로 미 뉴욕 법원에서 이자까지 포함해 6000억원대의 벌금을 선고받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는 스니커즈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Never surrender)’는 상품명을 붙였다. 2020년 대선 패배도, 이번 사법 판결도, 모두 ‘마녀사냥’이라 주장해온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운동화를 이용한 이미지메이킹 수준을 넘어 아예 운동화로 정치를 팔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는 그저 정치인의 ‘진짜’ 신발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노회찬 의원의 사후에서야 화제가 된 그의 낡은 구두에는 약자가 있는 현장 어디에나 달려갔던 한 정치인의 삶이 담겨 있었다. 정치인의 새하얀 운동화와 트럼프의 황금색 운동화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을까. 정유진 논설위원
정유진 논설위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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