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가 맞닥뜨린 ‘진실의 순간’ [김민아 칼럼]
야당은 영어로 오퍼지션 파티(opposition party), 즉 반대하는 당이다. 한국에도 과반 의석을 점한 오퍼지션 파티, 더불어민주당이 있다. 다만 오퍼지션(반대) 기능은 취약하다.
지난해 한국 경제성장률은 1.4%였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2% 아래 성장률 기록이 세 번 있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이다. 2023년엔 대형 악재가 없었다. 오로지 정부 책임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집요하게 따지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지난 15일 박성재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는 해 지기 훨씬 전에 끝났다. 전임 장관들 청문회는 대부분 자정 가까이에 마무리됐다. “검사 독재 청산”(이재명 대표)을 외치는 민주당의 칼날은 무뎠다.
오퍼지션 파티는 뭘 하고 있나.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오퍼지션 중이다. 한동안 친이재명(친명)-비이재명(비명)으로 갈려 싸우더니, 비명 핵심이 탈당하자 친명-친문(친문재인)으로 나뉘어 싸운다.
계파 갈등이 첨예할수록 공천 과정은 투명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문 정권 인사 중에서도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겐 불출마를 사실상 요구하면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겐 공천장을 줄 태세다. 현역 의원이나 비명 인사를 배제한 정체불명의 후보 적합도 조사도 이어지고 있다.
선거 패배 전에는 경고음이 울린다. 위기 신호 몇 가지는 이렇다. 첫째, ‘진’이나 ‘찐’ 같은 접두사의 부상이다. 2016년 총선 때 ‘진박 감별’ 운운하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을 보라. 주권자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장난치다간 심판당한다.
둘째, 당내 주류의 자기희생 없는 물갈이다. 당을 쇄신하고 국회를 바꾸려면 물갈이는 필요하다. 다만 효과를 발휘하려면 기득권자들의 기득권 포기가 필수다.
셋째, 근거 없는 낙관론이다. ‘샤이 진보’ ‘샤이 보수’를 거론하며 자당 지지층 가운데 ‘숨은 표’가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경우다.
민주당은 지금 세 가지 다 해당하는 것 같다. ‘찐명(진짜 친명)’을 과시하는 부류가 실재하고, 주류 핵심 가운데 불출마·험지 출마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샤이 진보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니 말이다.
선거는 과학이다. 지난 16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37%)이 민주당(31%)을 앞질렀다. 양당 격차는 오차범위 내이지만, 여론조사는 흐름이 중요하다. 이전 조사보다 국민의힘은 3%포인트 상승, 민주당은 4%포인트 하락했다.
총선 결과에 대한 희망을 묻자 ‘국민의힘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 36%, ‘민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 31%로 나왔다. 역시 오차범위 내 격차이지만, 1월 넷째 주 조사에서 33% 동률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민주당이 밀리는 추세임엔 분명하다(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 참조).
예견된 결과다. 민주당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승리 이후 정권심판론에 취해 있었다. 파격적 쇄신도, 피부에 와 닿는 정책도 없었다. 정권의 독선과 오만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도 못했다. ‘디올 백’에만 매달렸다. 공천 과정에선 이 대표가 직접 개입하며 무원칙·불투명 논란을 자초했다.
반면 여권에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전국을 돌며 공약을 ‘살포’하고 있다. 관권선거·포퓰리즘 비판도 외면한 채 전력질주 중이다. 공천 과정에서도 현재까지는 ‘용산발 내리꽂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올드 보이’ 김무성 전 대표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과 이 대표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에 맞닥뜨렸다. Moment of Truth는 “결정적 순간”을 가리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2년 투우 경기를 관찰한 에세이 ‘오후의 죽음’에서 사용하며 유명해졌다.
2016년 총선 당시 문재인 대표는 안철수 의원 탈당으로 진실의 순간에 직면했다. 그는 삼고초려 끝에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했다. 공천권을 틀어쥔 김종인 대표는 이해찬 의원 등을 컷오프하며 당의 변화를 알렸다.
이번에도 열쇠는 이 대표가 쥐고 있다. 친명·비명을 아우르는 통합적 선거대책위원회 구성, 주류 핵심 인사들의 선도적 희생 없이 위기 돌파는 불가능하다. 디올 백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제와 언어도 필요하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수수 의혹은 규명돼야 마땅하지만, 이것만으로 선거를 치를 수는 없다.
아시안컵 내내 무전략·무전술로 일관하던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요르단전에서 진실의 순간에 맞닥뜨렸다. 치욕적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그는 선수 탓을 하며 정신승리 중이다. 하지만 전 세계가 안다. 한국의 아시안컵 탈락에 누가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인지.
이 대표가 한국정치의 클린스만이 되지 않길 바란다. 야당다운 야당, 제대로 반대하는 야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주권자의 삶을 위해서는 물론, 카운터파트인 정권의 올바른 권력 행사를 위해서도.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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