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랩·신탁 ‘수익률 돌려막기’ 징계 앞두고... 금융당국, 고유자산으로 손실 배상 허용
이르면 3월 랩·신탁 관련자 징계 절차 개시
CEO 아닌 실무자선에서 징계 끝날 가능성
지난해 채권형 랩어카운트(랩)와 특정금전신탁(신탁)을 운용하면서 만기 미스매칭 전략을 활용해 고객의 수익률을 돌려막은 증권사가 무더기로 적발돼 손실 배상 절차에 착수했다. 금융당국은 증권사가 위법을 저지른 고객 계좌에 한해 회사 고유자산으로 배상하는 안을 용인했다. 통상 증권사는 고유자산으로 고객과 거래할 수 없으나 이번에 예외적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랩과 신탁은 펀드와 달리 증권사가 고객과 일대일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 상품이다. 원래는 단기물을 편입하는 상품이나 증권사들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만기 1~3년으로 유동성이 충분하지 않은 고금리 장기채권, 기업어음(CP) 등을 담았다. 만기 불일치(미스매칭)로 수익률을 끌어 올린 것인데, 미국이 금리를 연달아 올리면서 운용 전략이 망가졌다. 그리고 금감원은 법 위반이라며 징계에 착수했고, 증권업계는 업계 관행이었다면서 맞서고 있다.
19일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에 대해 고유자산 편입을 허용했다. 증권사가 법을 위반해 상품을 운용했고, 이 탓에 고객의 손실이 발생한 것이니 만큼 증권사가 고객의 계좌에 담긴 채권을 떠안아도 된다는 뜻이다.
자본시장법상 신탁업자(통상 증권사)가 신탁자산으로 자신의 고유자산과 거래하면 이는 불건전 영업행위다. 단 수익자를 보호하기 위한 거래는 불건전 영업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당국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불법 거래로 손실을 입은 랩·신탁 고객의 채권을 고유자산으로 매입하는 건 단서 조항인 ‘수익자 보호’라고 판단했다.
랩·신탁은 그간 법인 고객이 단기 자금을 운용할 때 자주 찾던 상품인데, 2022년 들어 문제가 생겼다. 레고랜드 채무 불이행 사태로 지방정부(강원도)마저 약속한 지급 보증을 이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이 번지자 채권 시장이 급격하게 얼어 붙어서다. 이에 다수의 법인 고객이 증권사에 랩·신탁 환매를 요청했으나 증권사들은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장기채권 등 편입 자산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증권업계는 각종 편법을 저질렀다. A증권사는 특정 고객 계좌의 CP를 다른 고객의 계좌로 고가 매도해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하는 방법을 썼다. 비정상적인 가격 거래로 고객의 수익률을 돌려 막은 셈이다. B증권사는 직접 고객의 랩·신탁에 있는 CP를 고가 매수해 1100억원 규모의 이익을 제공했다. 금융투자업자는 투자자에게 일정한 이익을 사후 제공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금감원은 위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적법한 손해 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고객의 신탁자산을 증권사 고유자산으로 편입해도 된다는 전향적인 당국 해석 역시 이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증권사가 고객에게 환매를 해주기 위해 무리하게 채권을 시장에 내다 팔 경우 물량이 쏟아져 가격이 왜곡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치다. 또 채권은 만기까지 갖고 있기만 하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어 고객의 채권을 증권사가 받아내도 장기적으로 큰 손실은 없을 것이라 점도 고려했다.
하지만 랩·신탁의 불건전 영업 행위로 금감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9개 증권사 중 고객에게 손해를 배상한 증권사는 2곳에 불과했다. 지난해 NH투자증권이 180억원, SK증권이 100억원 규모를 물어줬다.
나머지 KB증권, 교보증권, 미래에셋증권, 유안타증권, 유진투자증권, 하나증권, 한국투자증권은 손해 배상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이들 증권사는 금감원과 의견서를 주고 받으며 배상 기준을 검토 중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문제가 된 랩·신탁은 법인이 투자한 것이고, 법인의 전문 인력은 전문 투자자와 유사한 지위에 있다”며 “어느 시점에서 손실이 실현됐는지 애매한 건들이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랩·신탁 불건전 영업 행위에 연루된 운용역 약 30명을 특정한 상태다. 운용역은 물론 운용역에게 해당 행위를 지시한 자가 있다면 그 윗선까지 징계 대상에 오를 전망이다. 금감원은 이르면 다음 달 징계 절차를 시작할 방침이다.
징계 대상에 CEO가 오를 가능성은 작다. 부실한 펀드를 팔아 수조원의 환매 중단을 초래한 라임·옵티머스 사태 땐 증권사 최고경영자(CEO)까지 문책당했지만, 이번엔 금융당국의 칼이 CEO까진 닿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5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2024년 금감원 업무계획 기자간담회’에서 “’내부통제를 안 했기 때문에 CEO도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엔) 거부감이 있다”며 “CEO와 해당 임원이 직접 관여한 증거가 있는 경우 외에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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