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내 이야기 같아서, 박신혜와 박형식을 더 응원하게 된다('닥터 슬럼프')
불안과 상처...박신혜와 박형식이 보여주는 현대인의 자화상
[엔터미디어=정덕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진짜 너 때문에 버텨. 넌 꼭 누군가가 처방해준 약 같애. 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있어도 병원 안 간 거 너가 나한테 약 같아서, 이 무너진 마음을 자꾸만 일으켜줘서 그래서 안 간 걸지도 몰라."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슬럼프>에서 여정우(박형식)는 남하늘(박신혜)에게 좋아한다며 그 마음을 '처방약'에 빗대 표현한다.
이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의료사고를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병원까지 모두 접게 된 여정우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갖게 됐고, 갖은 구박을 다 들어가며 대신 논문을 써주고도 자신의 이름이 등재되지 않는 등의 갑질을 당했던 남하늘은 우울증 판정을 받았다. <닥터 슬럼프>는 이처럼 누군가를 치료해주는 의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의학드라마가 아니라 그들도 아프다는 걸 담는 드라마다.
그 상처를 <닥터 슬럼프>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달달한 장르 속에 담아낸다. 나락으로 떨어져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든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응원해주면서 사랑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그저 만나고 헤어지는 알콩달콩한 감정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이들을 다시 일으켜주는 서로의 처방약으로까지 나아간다.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으로서의 사랑.
그런데 극화된 사건들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들이 처한 상처들은 우리네 현대인들이 매일 같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과 결이 다르지 않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재난처럼 벌어지는 사회이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개인적 성공을 위해 타인을 가스라이팅하듯 조종해 한껏 이용해 먹고는 버리는 비정한 일들이 무시로 벌어지는 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여정우와 남하늘이 겪는 상처들이 다소 극화되어 있다고 해도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게 우리가 사는 사회이고, 그래서 우리 안에는 모른 척 치부해놓은 불안과 상처들이 있을 테니.
이러한 불안과 위험이 도사리게 된 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바꿔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만큼 중요해지는 건 이러한 외적 스트레스 속에서도 버텨낼 수 있는 내적 힘이 무엇이고 그걸 갖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을 해야하는가 하는 점이다. 흔들리는 중년의 이야기를 그렸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식으로 표현하자면 '외력'에 버티는 '내력'을 갖는 일이랄까.
<닥터 슬럼프>는 늘 정해진 대로의 길로만 달려나가던 여정우와 남하늘이 슬럼프로 넘어지고 나서 비로소 그간 치열한 경쟁의 삶만 살다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제야 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그 '내력'이 어디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전교 1,2등 하던 두 사람의 유쾌한 경쟁으로 드라마는 밝게 그려냈지만, 그 현실은 이들이 진짜 삶을 누리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남하늘이 데이트를 하자며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같이 읽는다거나 스터디 카페를 예약해 놓는 그런 일들은, 황당해 하는 여정우의 모습을 통해 코미디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현실의 단상이 담겨있다. 친구들과 방과 후 떡볶이를 먹으러 다니고, 오락실을 가고 때론 누군가를 만나 연애도 하고 하는 그 나이대에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했던 이들은 늘 일과 성과만 보고 달려오던 삶에서 넘어졌을 때 쉽게 일상으로 돌아와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
일상성의 건강함을 갖지 못한 이들은 불안과 상처 때문에 민경민(오동민) 같은 선배의 달콤한 거짓말과 가스라이팅에 속기도 하고 그 실체를 알게 됐을 때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든다. 또 힘겨운 그녀를 위해 당분간 일보다는 함께 옆에 있어주겠다는 여정우의 따뜻한 마음조차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느낀다. 사랑하는 이가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자신이 오히려 밉게 느껴지는 것.
이것은 결국 진실이 밝혀져 모든 누명을 벗어나게 된 여정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트라우마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늘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살아왔던 그는 자신이 이런 트라우마에 빠져 있고 그래서 힘겨워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아플 때 그걸 인정해주고 받아주던 그 누군가가 부재했던 탓이다.
과연 여정우와 남하늘은 서로의 처방약이 될 수 있을까. 그건 그저 달달한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그간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불안과 상처를 늘 갖게 됐던 그들이 보다 단단해지고 편안해지는 회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안타깝기도 한 이 두 사람에게 깊게 몰입되어버린 시청자들이 이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이 되는 이유이다. 불안과 상처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저들의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 같으니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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