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로마니쉐스 카페’의 소환

2024. 2. 19. 11:2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대화한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면 한자리에 앉지도 않는다. 한 진영에겐 진실이지만 다른 진영에게는 가짜뉴스가 된다. 언론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자기편에 유리한 정보만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게 아니라 상대편 진영을 응징하기 위해 투표장에 들어갔다.’

위 내용이 올해 11월 바이든과 트럼프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겨루는 미국으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사실은 1930년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모습이다.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은 남녀 보통선거가 실시되고 사회권과 같은 획기적인 권리가 도입되는 등 유럽에서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론 분단’으로 인해 정작 민주주의는 속에서 곪아 가고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극단적 사회 분열상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수도 베를린의 유명 사교클럽, 로마니쉐스 카페(Romanisches Cafe)가 유명하다. 그 좁은 카페 안에서도 부자 구역과 서민 구역으로 나뉘었고 좌파 우파가 섞여 앉는 일은 없었다. 종교에 따라 끼리끼리 앉았다.

이런 반목과 분열의 틈새를 파고들어 국민 갈라치기에 나선 게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중산층의 국민정당’이란 기치를 내걸고 보수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정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때 보수파들은 자기들 이익을 지키고자 히틀러에게 독재의 길로 나아가는 꽃길을 깔아 주었다. 주지하다시피 히틀러는 그 이후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 대량학살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을 저지른다.

요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민심 양극화에 따른 우경화와 배타주의 대두는 매우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특히 ‘트럼프 현상’으로 불리는 미국사회의 극단적인 분열상이 미국의 쇠락,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의 종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필자는 그 향배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독일인은 왜 히틀러를 선택했는가’의 저자 벤자민 카터 헤드도 1930년대 바이마르공화국의 양극화와 사회 분열 현상이 오늘날 세계와 너무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2021년, 대선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 의회 의사당을 습격 난입한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 건전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여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진 바가 있다. 한편 트럼프 전 대통령은 30개 이상의 혐의로 기소되어 있음에도 오히려 그의 선거캠프에는 기부금이 쇄도하고 지지율도 오르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전통 산업에 종사해온 백인 출신 블루컬러 계층이 중심인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중국에 빼앗겼다는 불만과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한 처지에 대한 분노를 트럼프를 통해 분출시키고 있다. 그 심정적 기저에는 글로벌화에 대한 피해의식과 반발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틈새를 파고든 것이 포퓰리스트 트럼프다.

여기에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되는 유튜브, 페이스북 등 SNS 플랫폼은 이들을 자기 확증에 빠지게 하고 피아 구별과 진영 구분을 유도하는 정치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정당의 기능을 마비시켜 대의민주주의 성숙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흉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가치 외교를 표방하며 서구식 민주주의의 조타수 역할을 떠맡아온 미국의 정치가 트럼프 현상으로 인해 포퓰리즘에 함몰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실로 우려할 만한 일이다. 조타수가 없이 항해에 나서는 배를 타려는 승객들은 아무도 없듯이, 대의민주주의 가치를 저버리는 미국을 따르는 동맹국과 우방국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쇠락은 예견되는 바이며, 반면에 국제사회에서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이 주도하는 브릭스(BRICS), 동남아시아의 아세안(ASEAN), 저개발국가 그룹 글로벌사우스 등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국제질서에서의 다극화는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곧 춘추전국시대, 즉 무질서와 분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며 분쟁 확산 가능성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한반도, 대만, 필리핀 근해는 언제 분출될지 모르는 동아시아 ‘분쟁의 화산대’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향방을 예민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만약 미국이 대의민주주의를 포기하고 포퓰리즘에 기반한 자국 이익 위주의 고립주의 방향으로 키를 돌리는 상황이 현실화된다면 부득이 우리는 생존 방정식을 새롭게 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근의 외신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검토에 착수했다는 소식이다.

분열과 갈등 구조를 숙주로 삼는 포퓰리즘의 확산은 독일 바이마르 시대나 지금의 미국이나 마찬가지로 국가 몰락과 제국의 쇠락을 유도한다. 이점을 말하고자 필자는 100년 남짓 전, 바이마르공화국의 ‘로마니쉐스 카페’를 소환했다. 우리 정치에서도 이런 망국적 풍조의 횡행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은 자명하다.

장준영 헤럴드 고문 전 항공대 초빙교수

raw@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