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가족’ 너머 다 함께 이사 걱정 없이 살 집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 위한 보편적 주거정책 필요
부부와 자녀 중심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정상 가족’ 개념이 변하고 있다. 가족의 형태는 혼인과 혈연 중심에서 벗어나 생계와 주거를 함께하는 공동체와 친밀한 관계로 확장하는 중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법적으로 혼인이나 부양책임 등으로 묶이지 않는 ‘비친족가구’는 2022년 51만3889가구로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았다. 비친족가구는 8촌 이내 친족이 아닌 남남끼리 사는 5인 이하 가구를 말한다. 하지만 현재의 주거정책은 여전히 결혼한 가구주 중심이다. 과거에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도, 마음 맞는 친구들 간의 동거나 경제적인 주거 공유 관계도 드문 일이었다. 정상 가족이 전체 가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시기가 겨우 한 세대 전 이야기였으니 정책의 궤도를 갑자기 수정하기는 쉽지 않을 터다. 하지만 이제 ‘표준’ 생애주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기존의 주거계획 수립 방식도 그에 맞춰 바꿔나가야 할 때다.
지난 1일, 서울 대방동 스페이스살림에서 70여개 사회운동·인권단체·풀뿌리 지역조직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2024 체체전환운동 포럼: 우리의 대안을 조직하자’ 행사가 열렸다. ‘주거권과 가족구성권, 하나의 지도만들기’ 세션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의 나영정 운영위원은 “현재의 주거정책은 대출 중심의 지원 정책과 극소수의 취약계층을 위한 주거복지 정책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인가구, 청년, 동거가족 등에게 분양과 대출 기회를 제공하는 주거권 요구가 대출 대상과 임대아파트 가산점 배정 등 제로섬 게임으로 왜곡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구정책이나 경기부양의 수단이 아닌, 주택법 제1조가 명시하는 바와 같이 ‘국민의 주거안정과 주거수준의 향상’이라는 목적을 기반으로 주거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전라북도 전주의 ‘비비사회적협동조합(이하 비비)’은 여성공동체주택 건립과 여성의 주거권 확보를 목표로 내세운다. 2003년 30대 비혼여성 6명 안팎이 모여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공동체에서 시작한 비비는, 2010년 구성원 6명 중 5명이 공공임대아파트에 입주하면서 1인가구 생활공동체로 확장되었다. 현재 전 세대(854세대)의 약 3%인 23가구가 비혼여성 1인가구이다. 비비로 연결된 아파트 주민 모임이 있지만, 규칙도, 회비도, 의무도 없다. 김난이 이사장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안정감과 소속감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구, 서로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이웃, 그리고 내가 갑작스럽게 이동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적정규모의 집이 비비가 말하는 주거권”이라고 설명했다.
아파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협동조합(이하 공간비비)’은 느슨한 1인가구 네트워크를 밀도 있게 엮는 역할을 한다. 상근자를 두고 있는 공간비비에서 요가, 소설 읽기 등 상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영화 상영이나 강연회 같은 공개행사가 개최되고, 소모임이 열린다. 김 이사장은 “안정적인 주거가 주는 삶의 풍요로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따로 또 함께 살아가기’를 실천해 온 비비는 이제 여성공동체주택 건립을 준비 중이다.
이미 공공임대아파트의 1인가구 네트워크와 공간비비를 통해 작은 마을을 만들어왔지만, 구성원의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고 ‘부모 돌봄’ 시기를 겪으며 노년의 삶에 대한 불안을 나눌 수 있는 수평적인 돌봄공동체를 꿈꾸게 됐다. 현재 공공임대아파트는 비비 구성원들이 뜻을 모아도 아파트 단지 자체의 구조물과 시스템을 바꾸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비비는 2019년부터 막연하게 꿈꿔왔던 공동체 주택을 현실화하는 방안으로 사회주택에 대해 함께 학습하며 준비해왔다.
하지만 그 기대는 지난해 연이어 물거품이 됐다. 비비가 준비해온 지자체(전주시) 사회주택이 청년 세대만을 위한 주택 공급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중노년 비혼여성 1인가구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비비는 제안서조차 내지 못했다. 공공매입임대의 장점과 다양한 유형의 주거서비스, 입주자 맞춤형 주거 및 공유공간 등 공동체주택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정부(국토교통부)의 ‘테마형 매입임대주택사업’은 정권이 바뀐 후 ‘특화형 매입임대사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 이사장은 “(현 매입임대사업은)기존 임대주택과 거의 같은 기준이 적용돼 커뮤니티 시설 등 입주자의 특성을 반영한 공간을 만들 경우 수익성이 떨어지고, 사업 자격이 기존 15호(채)에서 25호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는 비비는 사업 참여가 어렵게 됐다”고 설명했다. 비비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시도가 현실에서 잘 작동할 때, 청년세대를 포함해 다양한 주거 공동체가 뿌리내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다. 김난이 이사장은 “주거공동체는 계속 거주가 가능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공의 지원을 활용하는 한편,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연대형 주거모델을 만드는 실험이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투자지원재단’은 전세제도를 활용해 보증금을 시민이 함께 부담하고, 청년들이 적은 주거비로 거주할 수 있는 ‘터무늬있는집’을 만들었다. 2018년 시작해 현재까지 운영 중인 총 11호(누적 15호)의 터무늬있는집에는 13개 청년단체가 입주해 있다. 그동안 단체 및 개인 200여명의 출자자들이 출자한 금액은 9억5천여만원에 이른다.
터무늬있는집은 2020년부터 서울주택도시공사(SH)와 업무협약을 맺어 서울시의 방치된 빈집을 주거와 지역 활동이 연계된 청년 공동체주택으로 꾸미는 ‘터무늬있는 희망아지트’ 사업을 시작했다. 청년 개인이 아닌 주거공동체를 함께 운영하는 청년들이 거주하는 방식이다. 개인의 소득이나 취약함을 평가해 입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단체의 지역 활동 목표를 중심으로 입주자를 선정했다. 후원과 지원에 바탕한 주거 복지 차원의 활동을 넘어 청년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고 지역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의 정책 변화로 2022년 모집공고 이후 신규공급이 없는 상황이다. 사회투자지원재단 터무늬제작소의 성승현 선임연구원은 “그동안 민관협력을 통해 청년 주거 마련 및 지역재생,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최근 시의 정책 변화로 어려움을 겪은 것 역시 사실”이라며, 앞으로 민간의 여러 기관과 협력해 자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상반기 만들어지는 유기동물 임시보호를 함께하는 청년주거공동체 ‘터무늬있는 포인선녀방’(서울 관악구), 지역에서 공익 성격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청년단체가 운영하는 코워킹 및 커뮤니티 공간인 ‘터무늬있는 어부바하우스’(서울 도봉구) 등이 그것이다. “청년 1인가구 지원 정책이 늘고 있지만, 주거비 지원은 제한적”이라고 말하는 성 선임연구원은 “혼자서 높은 월세를 부담하며 좁은 방 한 칸에 살기보다 함께 거주하며 적정한 주거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청년들에게 더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개인들의 유연하고 다양한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의 함께 살기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주거 실천은 주택 소유권으로서의 주거권이 아니라 함께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주거권을 이해한다. 하지만 모두가 고민하는 집에 대한 문제를 개별 민간의 방식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의식주, 특히 주거권은 사회적 권리로 공공의 책임이 응당 존재한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부동산학)는 “주거권은 기본적인 인권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낮다”며 “세입자와 중산층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보편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효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jinnytr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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