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센 할머니들 너무나 멋있다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 시인 2024. 2. 1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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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박시우 시인의 옹천 할매
2022년 「기억의 시간을 만나다」
경북 청송에서 목격한 하루
소풍 후 술판 벌인 할매들
세상사 덧없는 꽃 같으니
화 풀리도록 놀아야 할 때

옹천 할매

할매 열 명이 든 방에 술병이 줄을 선다
한 명당 근 세 병쯤 비웠을 즈음
방문이 탕, 열린다

내 쓰레빠 어데 갔노! 저짜에 있시더
멀다카이 가차이 대라!
너불매기 조심하이소

화장실 가시는 길
식당 아들은 오금을 펴지 못하고
허리 꼿꼿한 할매는 걸거치게 핀
영산홍 귀빵메이를 걷어찬다

어데서 오셨니껴?
옹천서 왔니더
요케 한번 놀아삐야 썽이 풀린다, 아이껴

대전사 뒤편 주봉에는
해가 두어 뺨이나 남았다

「기억의 시간을 만나다」, 한국여성문예원, 2022.

경북 안동시 북후면에 가면 옹천리라는 곳이 있다. 그 마을의 할머니들은 기가 무척 센가 보다. 그 마을의 할머니들이 경북 청송에 있는 주왕산국립공원과 대전사大典寺 구경을 하고는 식당에 한 떼 밥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아니다. 술과 안주를 드시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식당의 방을 하나 차지하고선 술판이 벌어졌다. 기만 센 것이 아니라 술이 센 할머니들이다. 한 명당 술을 세 병쯤 마셨을 때 미닫이문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한 할머니가 외친다. "내 쓰레빠 어데 갔노!" 그 식당에서 심부름을 하는 주인 아들이 "저짜에 있시더" 하고 대답하자 할머니가 다시 소리친다. "멀다카이 가차이 대라!" 계속해서 명령조다.

주인 아들이 슬리퍼를 가져다주고는 "너불매기 조심하이소"라고 말한다. 봄이어서 독 오른 화사花蛇가 마당에 출몰하니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이다. 이 지역에서는 화사나 꽃뱀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너불매기라고 한다.

허리가 꼿꼿한 그 할머니는 마당을 지나가다가 자주색 영산홍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공연히 발로 찬다. 그 꽃에서 피 끓는 청춘을 본 것인가. "걸거치게 핀/영산홍 귀빵메이를 걷어찬다". 시샘이 난 것이다. 눈앞에 어지럽게 피어 있는 영산홍이 왠지 얄밉게 생각됐기 때문이리라.

주인 아들이 또 묻는다. "어데서 오셨니껴?" 하고. 할머니가 "옹천서 왔니더" 하고 대답하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요케 한번 놀아삐야 썽이 풀린다, 아이껴" 하고. 봄날 나들이로 주왕산과 대전사로 소풍을 온 것인데 산천경개 꽃구경을 실컷 한 뒤에 술을 마시기 시작, 해가 이슥도록 부어라 마셔라 즐거운 음주의 시간을 갖고 있다. '썽'이 풀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한국여성문예원]

이 시를 살리고 있는 안동 사투리와 할머니와 식당 주인 아들과의 대화 내용, 그리고 할머니의 행동거지다. 취하지 않았더라면 화장실 가다가 영산홍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발로 차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행위가 너무 귀엽지 않은가.

달은 차면 기울고 열흘 이상 피어 있는 꽃은 없다. 이 세상 사는 것이 덧없기에 때로는 술에 취하기도 하고, 취해서 쓰러져 자기도 하는 것이려니. 시인이 지방의 한 식당에서 본 이 광경이 한편의 시가 됐다. 봄에 청송으로 나들이 갔던 옹천리의 할머니 열 분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란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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