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숙인한테 집을 거저 줘?”… 초당적 20년 해법, 트럼프가 흔드나 [워싱턴 아나토미]

권경성 2024. 2. 19.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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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거 우선’ 홈리스 정책 위기
규모 감소 이끈 부시·오바마 공통 대책
2017년 반등에, 우파 “교정 먼저” 반격
임대난·불법이민에 폭증하자 포기 조짐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지난달 29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한 인도에 노숙인들이 누워 있다. 지난해 미국 노숙자 수는 65만3,000명을 넘겨 2007년 관련 집계 시작 이래 최다치를 기록했다. 오스틴=EPA 연합뉴스

약물 중독 치료 같은 전제 조건 없이 집 먼저 주고 거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주거 우선(Housing First)’ 접근 방식은 20년 넘게 미국 정부의 ‘홈리스(노숙인)’ 대책 기조 전략이었다. 보수·진보가 따로 없었다. 이념 노선상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인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2009년 1월~2017년 1월)가 더 적극적이었으나, 이런 접근 방식이 처음 채택된 것은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2001년 1월~2009년 1월) 때였다. 초당적 해법이었던 셈이다.

동요 시기가 없지는 않았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2017년 1월~2021년 1월) 후반이었다. 주택이나 ‘쉼터’(임시 보호소)에 수용되지 않은 ‘거리의 노숙인’이 동부보다 서부 주(州)에 더 많고 더 눈에 띄었다. 대선이 다가오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지역을 장악한 민주당을 공격할 꼬투리가 필요했다. “왜 노숙인한테 집을 거저 주느냐”라는, 간단하고 선명한 질문은 공세의 무기가 될 만했다.

현직으로는 드물게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낙선했고, 민주당 조 바이든 행정부(2021년 1월~)가 들어서면서 기존 정책은 계승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선동에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보혁 간 간극은 날로 커졌고, 그가 씨를 뿌려 다시 배태된 혐오감과 배타적인 우파의 대안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이제 그가 11월 대선을 통한 귀환을 채비하고 있다.


이념 공세에 흔들

한 노숙인이 미국 수도 워싱턴시 서쪽 포토맥강 공원 도로 인근 텐트촌으로 들어가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애초 노숙인 대책은 나선 계단식 모형 기반이었다. 출발지는 쉼터였고,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집에 들어가려면 직업훈련 또는 정신 질환이나 약물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다. 중도 포기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이 요구됐다. 1990년대부터였다. 집부터 줘 봤다. 그러나 집만 주지는 않았다. 정신 질환 치료 같은 서비스가 딸려 있었다. 강제 의무가 아니었을 뿐이다.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려는 심산이었다.

초기 실험 결과는 인상적이었다는 게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평가다. 정신 질환자 242명이 대상이었던 뉴욕시 프로그램 ‘주거로 가는 길(Pathway to Housing)’은 1993년 시작됐는데, 1997년까지 전체의 88%가 거리로 돌아가지 않고 집에 남았다. 일반 치료 방식을 적용한 대조군의 47%를 월등히 능가하는 비율이었다.

정책으로 소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첫 시도를 오바마 행정부가 물려받아 확대했다. 부침이 없진 않았지만, 해당 기간 미국 노숙인 수는 꾸준히 감소했다.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07년 당시 64만7,258명이던 수치가 2016년 54만9,928명으로 줄었다. 감소율이 15%나 됐다. 노숙인 대상 무료 급식소로 출발한 워싱턴시 비영리 사회복지 단체 ‘미리엄스 키친’의 부국장 애덤 로캡은 NYT에 “당시 노숙인 종식 낙관론이 너무 높아져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는지 묻는 직원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미국 노숙인 규모 변화. 그래픽=송정근 기자

트럼프 행정부도 출범 땐 주거 우선 전략과 함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 취임 후 노숙인 수가 반등했다. 급선회의 기점은 그의 재선 캠페인 행보가 본격화하던 2019년이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의 노숙인이 두드러졌다. 많이 늘기도 했거니와 로스앤젤레스(LA)와 샌프란시스코 노숙인의 쉼터 이용률은 동부·중부 도시보다 크게 낮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노숙인 문제를 지렛대로 민주당의 실정과 무능을 부각했다.

기껏해야 예산 쟁탈전에 머물던 복지 원칙 논쟁의 차원을, 이념 패권 다툼인 ‘문화 전쟁’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띄운 쟁점을 제도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다듬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파 싱크탱크들의 몫이었다. 텍사스주 오스틴 소재 ‘시세로 연구소’가 설계한 ‘시세로 모델’은 2021년부터 텍사스와 테네시, 미주리, 조지아 등 보수색이 강한 주들의 주거 우선 접근 대안 입법에 실제 활용되고 있다. 반격의 핵심은 ‘노숙의 범죄화’다. 노숙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구 주택이 아니라 단기 격리 공간이다. 보호보다 교정이 먼저라는 게 우파의 기본 인식이기 때문이다.


퍼펙트 스톰

설상가상 그간 축소 노력이 무색하게 노숙인이 폭증했다.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후폭풍이다. 미국 주택도시개발부(HUD)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월 기준 미 노숙인 수는 65만3,104명에 이른다.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1년 새 12%(7만여 명)가 늘어난 결과다. 팬데믹 직후인 2022년을 제외하면 역시 사상 최대 증가폭이다.

미국 워싱턴시 서쪽 포토맥강 공원 도로 인근 노숙인 텐트촌. 지난해 시의 시내 공원 노숙 금지 방침에 따라 변두리로 밀려났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여러 요인이 맞물렸다. 일단 거리 유입이 엄청나게 늘었다. 팬데믹 기간 정부가 위헌 논란을 무릅쓰고 시행한 세입자 퇴거 유예 조치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많아진 데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경 통제 실패 탓에 급증한 불법 월경 이민자까지 포개졌다. 데니스 컬헤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라틴계가 2022년과 지난해 사이 증가한 노숙자의 55%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원래 집은 모자랐고,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으려 정부가 정책적으로 조장한 고금리 국면에 주택 담보 대출 이자 부담을 세입자에게 전가하는 집주인이 많아지며 임대료가 급등했다. 팬데믹 이후 기본 주거비 상승률은 20%가 넘는다. 연방정부의 주거 지원은 수요를 따라잡기에 역부족이다. 적격 대상 4가구당 1가구에 그치고 있다. 집에 대한 수요와 공급 측면의 악재가 겹쳐 ‘퍼펙트 스톰’(개별적으로는 위력이 크지 않았지만 다른 자연 현상과 동시에 발생해 파괴력이 배가된 폭풍)이 된 형국이다.


집을 주는 데엔 이유가 있다

갈수록 노숙인은 갈 곳이 없다. 노숙인 정책의 난맥상을 잘 드러내는 곳이 수도 워싱턴시다. 팬데믹 기간, 시 정부는 연방 자금을 받아 병에 걸리기 쉬운 노숙인 80명가량에게 남서부 한 호텔을 거처로 제공하는 ‘의학적 취약 주민을 위한 팬데믹 비상 프로그램(PEP-V)’을 가동했다. 시가 지난해 봄 웨스트엔드 지역의 옛 조지워싱턴대 기숙사 건물을 사들인 것은 프로그램 종료 뒤 일반 노숙인 수용 시설로 이관하기 힘든 그들에게 맞춤형 쉼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극심한 한파가 닥쳤던 지난달 16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고속도로 아래 노숙인 텐트촌에서 한 노인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손을 쬐고 있다. 시카고=AP 연합뉴스

그런데 같은 해 8월 구매 계약을 마무리하고, 연내 개소를 준비하던 와중에 장애물을 만났다. 경제적 악영향 탓에 손해를 볼지 모른다고 걱정한 주민들이 지정된 토지 용도에 노숙인 쉼터가 맞지 않는다며 집단 소송을 낸 것이다. 개소는 반년 연기됐다. 비영리 단체 ‘워싱턴 노숙인 법률 클리닉’의 앰버 하딩 대표는 본보 인터뷰에서 “안전망이 사라지면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주민들만 이기적인 건 아니다. 상수도·전기 접근이 용이한 공원은 그나마 노숙인이 텐트를 치고 살 만한 곳이다. 그러나 민주당 소속 뮤리엘 바우저 워싱턴 시장은 팬데믹이 사실상 종료된 지난해 초부터 그들을 내쫓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해 2월 시 최대 규모였던 백악관 인근 공원 ‘맥퍼슨 스퀘어’의 노숙자 텐트촌을 철거했다. 건물주와 세입자의 불평이 반영됐고, 연방 기관인 국립공원관리청(NPS)과도 교감했다.

역시 민주당 소속이자 흑인 여성인 캐런 배스 LA 시장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전국 노숙인 법률 센터’의 정책 책임자인 에릭 타스는 미국 LA타임스에 “주택을 짓기보다 몰아내는 게 더 쉽다는 것을 정치인이 알게 됐다”고 꼬집었다. ‘전국 노숙인 연합’ 대표 도널드 화이트헤드도 미 워싱턴포스트(WP)에 “진보 도시조차 주택 부족 같은 구조적 문제 해결 없이 단속만 하려 한다”고 질책했다.

2022년 3월 14일 미국 뉴욕시 맨해튼 거리 모퉁이에서 경찰관이 노숙인 옆을 지나가고 있다. 뉴욕=AFP 연합뉴스

주거 우선 접근이 포기돼선 안 되는 까닭은 노숙자를 거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서다. 컬헤인 교수는 NYT에 “거리의 삶은 위험하고 여기서 빨리 구출하는 게 노숙인 정책 성패의 관건”이라고 짚었다. 집을 먼저 주는 데엔 이유가 있다. ‘노숙인 종식을 위한 전국 연합’의 앤 올리바 대표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거처를 갖게 되면 다른 삶의 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 산하 노숙인 유관기관 협의회 회장인 제프 올리벳은 노숙자 증가가 주거 우선 접근 탓이라는 우파 공세를 “두통이 아스피린 탓이라고 투덜대는 꼴”이라고 일축했다.

노숙인에게 범죄자 낙인을 찍는 방식은 공정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게 진보 진영 주장이다. 지난해 12월 사망 노숙인 추모 연례 워싱턴 시내 행진에 참여한 레지널드 블랙은 WP에 “집 없이 죽는 사람 대부분은 유일한 범죄가 가난인 유색인종”이라고 말했다. 진보 성향 워싱턴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한나 러브 연구원은 작년 12월 보고서에서 “노숙인을 범죄자로 만들면 이들이 주택을 임대하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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