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요산문학지도’라는 성취 앞에서
요산 작품 속 공간 지도로 “해냈다”는 성취감과 선례
지난 16일 부산 금정구 남산동 요산김정한문학관에서 2024년 ㈔요산김정한기념사업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한 해를 총괄하고 새롭게 1년을 시작하는 자리인 정기총회답게 굵직하고 중요한 사안이 논의되고 결정됐다.
이날 문학평론가·연구가 황국명 인제대 명예교수가 ㈔요산김정한기념사업회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부산 정신’을 상징하는 큰 작가,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을 기리고 남기고 알리는 일을 이끄는 수장이 새로 임명된 일은 뜻깊은 소식이다. 조갑상 직전 이사장이 개인 사정으로 다소 갑작스럽게 물러나면서, 황국명 신임 이사장은 조 전 이사장의 잔여 임기를 물려받게 됐다. 그의 임기는 오는 2025년 12월까지이다. 요산김정한문학관장은 부산대 이재봉(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맡았다.
기념사업회는 갑진년 벽두의 정기총회에서 원래는 예정에 없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요산 문학의 중요성과 작가 김정한의 드높은 가치를 잘 아는 황 이사장은 “완수해야 할 몇 가지 사업도 있기에 자질 없는 사람이 무거운 자리를 맡게 됐다”며 “요산 김정한 문학 전집을 증보·개정할 필요도 느끼며 요산 선생에 관한 자료를 집성하는 아카이빙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요산 문학을 중심에 놓는 국제학술대회를 열 수 있는 역량도 우리에게 있다고 본다”고 제시했다.
정기총회의 ‘스타’는 또 있었다. ‘요산문학지도’였다. 기념사업회에 속한 요산문화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많은 공력을 들인 끝에 끝내 만든 요산문학지도는 이날 총회에서 회원들에게 공개됐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치열한 작가였다.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요산의 메시지도 치열했지만, 그는 작품의 공간 배경과 무대에 관해서도 치열했다. ‘사하촌’ ‘항진기’ ‘모래톱 이야기’ ‘뒷기미나루’ ‘수라도’ ‘제3병동’ ‘인간단지’ ‘산거족’ ‘추산당과 곁 사람들’ ‘회나뭇골 사람들’ …. 숱한 소설에서 요산은 공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공간을 장악하지 않은 채 작품 속에 반영하는 경우란 없었다. 그래서 요산 작품 속 장소와 장소성이 아주 중요하다.
32쪽짜리 책자로 제작된 ‘요산문학지도’는 요산 문학 속에 내장된 공간성을 지도라는 시각 자료로 구현하고, 코스로 정리했다. 이를 통해 요산의 작품세계와 문학정신이 구체성·생동감에 올라탄 채 독자에게 달려든다. 요산문학지도의 구성은 이렇다. 1. 동래권역-사람다운 길 2. 낙동강 권역-생명의 길 3. 부산 권역-정의로운 길 4. 남해 권역-회나무 길 5. 확장 권역-시련·연대의 길.
동래 권역에는 남산동 범어사 금강공원, 양산 법기·어곡, 울산 등이 포함되며 코스도 정리해두었다. 낙동강 권역에는 삼랑진 원동 대저 구포, 을숙도 모래톱 등이 보인다. 부산 권역에는 서구 중구 영도구 초량 범일동 서면 등 부산 원도심이 들어 있다. 요산 선생이 한때 살았던 남해군 권역이 있고, 확장 권역에는 ‘삼별초’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 ‘곰’ ‘길벗’의 공간 배경 정보를 정돈했다. 지리산 거창 산청 쌍계사 등이다.
황국명 이사장은 “이번에 우리가 힘을 합쳐 내놓은 요산문학지도는 한국 문학계에서 극히 드문 시도이자 성과인 것으로 안다. 활용법을 더 많이 개발하면서 보완해 가면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요산문학지도를 펼쳐 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는 ‘해냈다’였다. 이런 성취감과 성취의 체험은 소중하다. 문학예술 단체는 정기간행물을 펴내는 사업을 제외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프로젝트를 펼치기 어렵다. 사람도, 재원도, 선례도 없으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산김정한기념사업회는 다채롭고 치열한 노력을 펼쳐 요산문학지도라는 성과를 만들어냈고, 이를 시민과 공유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유튜브 채널 ‘요산문화연구소’에 들어가면 ‘요산문학지도-정의로운 길’ 편을 담은 20분짜리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상의 짜임새가 꽤 훌륭하다. 지도를 만들고, 이걸 바탕으로 영상도 만드는 변주와 활용은 이미 시작됐다. 이 지도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2023 한국작고문인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또 한 가지는 요산 문학의 치열한 정신성을 시각으로 확인하는 짜릿함이다. 주위에 ‘요산 작품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 ‘올드(old)한 느낌이 날 것 같다’고 무심코 말하는 분이 있다. 그럴 리가 있나. 요산은 집필실에만 들어앉아 관념 소설을 쓴 작가가 아니다. 치열하게 답사·취재·조사하고, 날 선 정신성을 가미해 진지하게 써 내려갔다. 그런 작가의 작품이 온도가 낮을 수가 있겠나? 나림 이병주, 향파 이주홍을 비롯해 기리고, 알리고, 간직할 예술가가 부산에 많다. 요산문학지도는 좋은 선례다.
조봉권 부국장 겸 문화라이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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