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 “당신도 광야를 헤매는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광야가 있다고 차인표는 말했다. 사나운 벌판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굽이굽이 자신을 일으켜 세운 손길이 있었다고 했다. 입양으로 시작해 극빈국 아이들과 탈북자 돕기, 마약 퇴치 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도 그 사랑을 되갚기 위해서였다.
영화 ‘바울로부터’ 시사회에서 차인표를 만났다. 그는 최근 사도 바울의 일대기와 행적을 다룬 CGN 10부작 다큐에 출연했다.
◇위기의 한국 교회에 경종을
-왜 바울인가?
“바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삶이 180도 달라진다. 돌과 채찍을 맞으면서도 예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고 끝내 순교한다. 최초의 선교사였던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도 없었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배우가 종교 다큐를 찍기가 쉽지 않을 텐데.
“지난해 1월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톰 라이트의 ‘바울 평전’이었다(웃음). 꽤 오래전 사둔 책인데 마침 새해 첫날부터 읽고 있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런 것 같다(웃음). 한 달 이상 집을 비우는 일인 데다, 암 투병 중이셨던 아버지 때문에 망설였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키프로스, 이스라엘, 튀르키예, 몰타, 이탈리아 등 여섯 나라에서 2~3일에 한 번씩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비행기를 수백 번 넘게 탔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증세였다. 순간 내가 믿고 의지하고 목표로 삼아왔던 모든 것, 그것이 돈이든 얄팍한 명예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든 그 어떤 것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저 하나님만 찾았다. 제발 숨쉬게 해 달라고.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하찮은 존재였다. 바울처럼.”
-왜 바울처럼인가?
“유대교 최고 엘리트였던 바울은 예수를 만난 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낮아지고 겸허해진다. 스스로 재판관처럼 살아온 나의 교만이 바울 다큐를 찍으면서 무너져내렸다.”
-위기의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하더라.
“바울은 명예나 부귀영화를 위해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완성한 궁극의 사랑과 용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온몸을 던졌다. 지금 한국 교회에 그런 절박함이 있는지 바울은 묻는다. 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일깨운다.”
◇고비사막에서 만난 은하수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로 벼락 스타가 된 차인표의 이미지를 바꾼 건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이었다.
“하기 싫어서 계속 고사했던 작품이다. 몽골로 중국으로 몇 달씩 촬영 다니며 고생할 테고, 흥행은 절대 안 될 거고(웃음). 누가 탈북자 영화를 보겠나.”
-그때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건가?
“몽골 고비사막으로 답사를 갔을 때 급체가 와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오한에 떨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양탄자처럼 덮여 있더라. 수많은 탈북자가 이 사막을 건너다 저 은하수를 보며 죽어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 영화는 내게 일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확신이 왔다.”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시위도 했던데.
“‘크로싱’ 개봉 4년 뒤 일이다. 중국 공안에 붙잡힌 탈북자 30여 명이 강제 송환 위기에 처했는데 영화 찍을 때 알게 된 여명학교 아이들의 형제와 부모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중국 대사관 앞에 가서 호소문을 발표했다. 탈북자의 인권과 생존에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세계인도 주목할 거라고 믿었다. 탈북자들도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입양, 후회한 적 없다
-남경필 전 경기지사와 마약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제 나이가 연예계에서는 이제 많은 축에 든다. 작품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뭐라도 조금 돕고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예인들이 몹시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상의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소문이 날까 봐. 자살 충동을 느끼고, 마약을 하게 되더라도 상담과 치료의 길로 들어서기 힘들다. 그래서 남경필 형님께 연락을 드렸다.”
-단체 이름을 정했다고 하더라.
“‘N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마라)’을 줄인 NGU,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은구(恩求)가 된다. 마약 치료 전문가인 조성남 국립법무병원 원장님과 셋이서 2주에 한 번 줌 회의를 하며 준비하고 있다. 남 지사님 말씀대로 마약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자식이나 손자들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문제다.”
-그 사이 배우 이선균씨 사건이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사건 전말을 제가 다 모르니 뭐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가 ‘사랑을 그대 품 안에’가 방영된 지 30주년이더라. 이 드라마에서 만난 신애라씨와 결혼했다.
“아내한테 많이 배운다. 내가 갈피를 못 잡을 때 조언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성격은 매우 다르다던데.
“지금도 안 맞는다(웃음). 아내는 외향적이고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내성적이고 집에 있기를 좋아한다. 살림에 대한 아내의 깨알 원칙을 내가 잘 못 따라가 매일 잔소리를 듣는다.”
-부부가 함께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성격은 다르지만 인생의 한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입양한 예은이, 예진이는 많이 컸겠다.
“예은이는 고3, 예진이는 고1이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예진이는 언어 치료사가 꿈이고, 공부엔 별 관심없는 둘째 예은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꿈이라 메이크업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
-잔소리도 하나?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꼭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할 일은 아이들한테 충분히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실패했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버팀목이 돼 주는 것이다.”
-입양을 후회한 적은 없나?
“한 번도. 너무 오래된 일이라 우리가 입양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웃음). 내가 젊다면 또 입양할 텐데. 이젠 우리 세 아이가 결혼해 입양을 하지 않을까.”
◇ 내 인생의 광야
-차인표의 인생에 광야는 언제였나.
“1987년 한국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산 6년이다. 한 푼 두 푼이 절실할 만큼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시간이다.”
-아버지가 해운업을 하지 않았나.
“내가 중학생 때 부모님이 헤어지셔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차인표의 이미지는 언제나 금수저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웃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 11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뉴저지의 한 정신병원에서 간호 보조사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덕분에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를 맞기도 했다.”
-어떤 크리스마스였길래?
“40년 전인데도 정확히 기억난다. 그날 중환자 병동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마약중독 환자를 밤새 지켜보는 일이었다. 자살할 위험이 있어 화장실 갈 때도 따라다니고 잠들었을 때도 병실 문 앞에 앉아 그를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 문득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온다면 어디로 오실까 생각했다. 에드워드라는 저 남자처럼 누가 쳐다봐 주지 않으면 자기 목숨 하나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오지 않을까.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청년들에게 ‘오늘 하루로 인생이 결정나지 않는다.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고 했더라.
“한국에 돌아와 200군데 이력서를 냈는데 딱 한 군데서 연락이 왔다(웃음). 그런 내가 배우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했다. 조상님들 묘를 정리하러 선산에 갔다가 증조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까지 30~40명 이름이 적힌 비석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증조부는 빈농으로 태어나 빈농으로 살다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만일 힘들다고 중간에 삶을 포기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수백 수천 대의 어머니들이 품어온 사랑의 결정체이자 누구도 폄훼할 수 없는 존재다. 이 기적 같은 삶을 포기해선 안 된다.”
-소설도 쓰더라. 벌써 3권을 발표했다.
“글을 쓸 때 내가 가장 자유롭다고 느낀다.”
-위안부 피해자인 훈 할머니를 모티프로 삼은 첫 소설 ‘잘 가요 언덕’은 이어령 선생이 극찬했던데.
“큰아이가 4학년일 때 ‘나눔의집’ 봉사를 함께 다녔는데,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게 안타까웠다. 이분들이 다 떠나시면 누가 이 슬픈 역사를 알려줄까, 하는 생각에 동화처럼 써본 작품이다.”
-본업은 배우다. 아카데미상에 대한 포부는 없는지.
“저까지는 기회가 안 올 것 같다(웃음). 그리고 한 번도 그런 영예가 내 삶에 중요하지 않았다.”
-컴패션을 통해 20년간 후원해온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나?
“우리 부부가 가장 처음 후원한 아이가 리카다. 개중엔 변호사, 국회의원이 된 아이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리카는 자기 엄마처럼 싱글맘이 됐다. 얼마 전 만났는데 아내와 부둥켜안고 울더라. 그래도 우리는 변함없이 리카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할 것이다. 끝까지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당신은 돈이 많아서 나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부자라도 나누지 않으면 거지이고, 거지라도 나누면 부자라는 말은, 구두를 닦아 모은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김정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당신도 광야를 헤매는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 있다.”
☞차인표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충암고, 미국 럿거스대학을 졸업했다. 1993년 MBC 탤런트로 입사,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강풍호 역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배우 신애라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공개 입양했다. 컴패션을 통해 빈곤국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으며, 탈북의 아픔을 그린 영화 ‘크로싱’에서 열연했다. ‘잘 가요 언덕’ 등 세 편의 소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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