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파서, 극장에 갑니다

이태훈 기자 2024. 2. 1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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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등을 앓는 주인공 통해 마음 보듬는 공연들 잇달아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생소한 마음의 병을 앓는 주인공 키키(이휘종·이수정)가 치유 경험을 털어놓는 토크쇼 형태로 경쾌하게 구성됐다. /공연제작소 작작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렵고, 자아감은 불확실하며, 마음은 공허함으로 가득하지. 아무에게나 척척 안기고 싶고, 거절당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 작은 자극에도 벗겨진 피부에 화염방사기를 쏘는 것처럼 아프고….”

창작 초연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 장애 다이어리’(이하 ‘키키’, 작·연출 조윤지, 작곡 김승민)의 주인공 키키는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진단명은 생소한데 가만히 귀 기울이면 신기하다. 정도의 차이일 뿐, 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 매일 저녁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를 가득 채우는 회전문 관객들은 키키가 조금씩 삶의 희망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함께 울고 웃으며 위로받는다. 아픈 마음을 다루는데도 시종 밝고 경쾌한 것은 이 뮤지컬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래픽=백형선

◇'마음의 병’ 위로하는 콘텐츠

2022년 보건복지부 정신 건강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은 성인 4명 중 1명 이상이 적어도 평생 한 번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경험한다(정신장애 평생 유병률 27.8%). 22년 한 해 동안만 259만명이 의료 기관에서 정신 건강 관련 진료(치매 제외)를 받았다. ‘경계성 인격 장애’는 통상 인구의 5% 정도로 추산되며, 조현병·조울증·우울증 등도 흔해졌다.

이제 마음의 병은 두렵거나 멀리할 무언가가 아니라 이해하고 함께 이겨나가야 할 일상적인 일이 됐다. 대중문화가 이를 다루는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다중 인격, 빙의(憑依) 현상 같은 흥미 위주 접근은 이제 구식이다. 지난해 말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마음의 병을 위로하는 콘텐츠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다양한 정신 질환을 사례 연구처럼 다루면서도 환자와 주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전개로 세계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어, 작년 11월 초 주간 톱 10에서 비영어 시리즈 세계 4위까지 올랐다.

그래픽=백형선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둬요”

뮤지컬 ‘키키’는 20여 년간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은 미국 작가의 회고록을 원안으로 극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녹였다. 주인공 키키는 마음의 병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충동에서 ‘안전’해지려 노력하면서, 자기 안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소중한 사람과 ‘화해’하는 과정을 밟아간다. 의사는 ‘자해 대신 차가운 얼음을 손에 쥐라’고 차근차근 일러주고, 직장 동료들은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 말고 할 말은 하라고 이끌어 준다.

주인공 키키 역에 이휘종·이수정 남녀 배우를 더블 캐스팅해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변화를 준 것도 다양한 관객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들뿐 아니라 고양이 같은 동물들까지 몸 던져 표현하며 극을 이끌어가는 앙상블 배우들의 공도 크다.

극작까지 맡은 조윤지 연출과 대학 시절부터의 콤비로 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김승민 작곡가는 팝과 재즈, 가스펠과 로큰롤을 가뿐히 넘나드는 노래들로 무대를 채웠다. 창작 초연인데도 세련된 상업 뮤지컬처럼 매끈하다. 덕분에 관객은 키키의 치유 과정을 생생하게 따라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라’는 조언에 귀 기울이게 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15명과 이 뮤지컬을 함께 관람한 정찬승 전문의(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이사)는 “정서적 혼란이나 어려움을 왜곡·편견 없이 들여다보며 자신과 주변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어서 의사들도 이 작품의 접근법을 좋아했다”며 “특히 치유 과정에서 개인의 노력만큼 가족과 친구의 지지를 중요하게 다룬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전 석 6만6000원, 공연은 25일까지.

◇불안장애·조울증·조현병도 무대에

올해는 ‘키키’ 외에도 마음의 병을 위로하는 연극과 뮤지컬이 줄줄이 무대에 오른다.

오는 23일 개막하는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는 갑작스레 엄마가 조현병 진단을 받으면서 고등학생 딸 사라가 달라진 일상, 주변의 시선, 세상의 편견과 맞서가는 이야기. 각광받는 젊은 극작·연출가 최치언 연출작으로, 강연형 공연(lecture performance)’이라는 독특한 형식, 개막도 전에 시작된 조현병 환자·가족들의 응원도 화제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내달 3일까지.

내달 5일부터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16년간 조울증(양극성 인격 장애)을 앓아온 엄마와 상처받으며 애써온 가족의 이야기. 미국 토니상 3관왕에 퓰리처상까지 받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원작이다.국내에서도 2011년 초연 이후 꾸준히 공연됐다. 이번 공연에선 최정원과 배혜선이 엄마 ‘다이애나’를, 이건명과 마이클 리가 아빠 ‘댄’을 맡는다.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5월 19일까지.

내달 28일 국내 라이선스 초연을 올리는 ‘디어 에반 핸슨’도 큰 기대를 모은다. 토니상 6관왕 등 해외 공연상을 휩쓸고 온 브로드웨이 흥행작으로, 불안장애 외톨이 소년 에반이 주인공. 치료를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쓴 에반의 편지가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 코너의 유품으로 발견되면서, 에반은 자신을 아들의 유일한 친구라고 믿게 된 코너의 부모님들을 위해 둘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한다.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6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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