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무전공 유감

경기일보 2024. 2. 1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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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경희대 명예교수

우리 사회는 상대의 신상을 털어 나름대로 계열, 서열로 정리하는 일이 우선인 편이다. 협력이 요구되고 관계에 대한 정도 관리가 중요한 농경산업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이 ‘신상털기’는 산업사회의 경제활동과는 별도로 생활공동체로서의 인간사회에도 만연해 있다. 어느 집 자식은 어떤 학교, 어느 전공에 입학, 졸업했으며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경제적으로 잘 또는 못 살고 있고를 내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이 정보는 나의 일상보다 더 중요하다.

사회의 특성에 따라 신상털기가 중요한 주관적 성향인 주체의 상대로서, 신상털기가 중요하지 않은 객관적 성향이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어서 터는 사람이 있으면 털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털고 털리는 일에 대한 중요도의 깊이에 기인하는 것 같다.

터는 사람의 주관적 성향은 매우 강해 털어지지 않는 일을 참기가 어렵다. 털지 않고는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인문의 특성인 주관과 직관이다.

털리기 일쑤이며 털리는 일이 대단한 일이 아닌 사람은 사람의 관계에 대해 크게 괘념치 않는다. 나를 털고자 하는 상대의 일이 너무 주관적 비교라서 내 머리에 담기가 어렵고 복잡하다. 변함없이 돌아오는 날씨의 변화에 여러 작물을 경작하고 수확하는 일이 쉽다. 과학의 특성은 객관과 계량이다.

이동과 이주로 목축을 하는 노마드와 달리 정착으로 작물을 경작하는 농경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는 신상을 털고 사는 주관적 사회에 가깝다. 대부류 집단으로서 국민의 정서는 때때로 규정과 법보다 중요하다. 객관화된 노마드의 서구 사회와는 차이가 크다. 이 주관에 의한 인문적 정서는 조선 왕조를 500여년이나 지속하게 했다. 사농공상의 사회적 서열은 뚜렷했으며 이에 근거한 신상털기는 여전히 현재의 생활에 남아있는 듯하다.

인문적 성향과 과학적 성향은 타고난 유전자에 기반하며 발현과 후성적 습관 및 훈련에 의해 구분된다. 각자는 나름대로 어떤 부류인지 스스로 짐작은 한다. 그러나 아직 개체는 애매하지만 오히려 효율적이고 심오한, 그래서 언제나 후성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자질에 대한 자각이 어려운 사회 속에 가둬져 있다. 그래서 자율 전공, 무전공, 융복합 전공이 더 어렵다. 그중에는 수능 점수라는 신상털기로 구분되는 학원의 배치표에 의존해 전공을 정하기도 한다. 전공과 무전공이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대치적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직 신상털기의 사회에는 여전히 전공과 무전공이 다르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빅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의 시대에 고정된 판박이의 전공지식으로 무장해 사회에 기여하기 또는 두각을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전공을 정하지 않는 자율 기반의 학업은 스스로 무한한 잠재성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인간의 뇌는 그 씀씀이에 대해 유전적 다양성보다 더 큰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후성적 변화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계 그 자체가 고정적인 틀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적 전공이 아닌 잠재적 변화의 요인이 적용된 능동적 호기심을 만족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다양한 문명이 발생했다. 무전공의 잠재성을 보장하는 사회에 더 이상 신상털기식의 서열과 구분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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