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 최초 테너’서 영감… 암흑기 청춘들의 꿈과 고뇌

이강은 2024. 2. 1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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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일 테노레’ 흥행가도
항일 정신 담긴 오페라 위한 분투기
우리 이야기 다룬 순수 창작물 의미
18인조 오케스트라 넘버, 매력 극대화
“흠 잡을 데 없는 공연” 호평 쏟아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서 25일까지

공연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IL TENORE)’가 제대로 일을 냈다. 지난해 12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뒤 두 달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이 초연부터 1000석 규모의 주요 극장 무대에 올라 흥행 가도를 달리는 건 드문 일이다. ‘일 테노레’를 두고 평단과 관객들 사이에선 대본, 음악, 연출, 연기, 노래, 무대, 주제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고 재미와 감동이 넘친다는 호평이 상당하다.

특히 소설·희곡·영화 등 유명 원작이나 외국 배경·소재에 바탕하지 않고 우리만의 이야기로 만든 순수 창작 뮤지컬이란 점에서 ‘일 테노레’의 흥행이 더욱 반갑고 의미 있다는 반응이다.
‘일 테노레’ 박천휴 작가(왼쪽)와 윌 애런슨 작곡가. 오디컴퍼니 제공
이탈리아어로 ‘테너’를 뜻하는 ‘일 테노레’는 한국 오페라의 개척자이자 ‘동양 제일의 테너’라 불린 이인선(1907~1960)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를 나온 이인선은 성악가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1934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다. 3년 지나 귀국한 그는 의사와 성악가를 겸업하면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조선오페라협회를 조직하고, 1948년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를 선보인다.

오랜 단짝으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2012)와 ‘어쩌면 해피엔딩’(2016) 등을 함께한 작가 박천휴와 작곡가 윌 애런슨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1948년 이인선이 진두지휘한 한국 최초 오페라 공연 ‘춘희’ 흑백사진을 보고 ‘일 테노레’에 관한 아이디어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후 오페라와 독립운동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1930년대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 청년들의 꿈과 열정, 아픔을 버무린 이야기와 음악을 ‘일 테노레’에 담았다.
의사 겸 테너로 한국 오페라의 개척자인 이인선의 삶에서 영감받아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 공연의 한 장면. 조선 최초의 오페라 제작과 독립운동을 엮어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들의 꿈과 열정, 아픔을 버무린 이야기와 음악이 많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오디컴퍼니 제공
우연히 접한 오페라의 매력에 빠져 테너가 되려고 의대까지 관둔 ‘윤이선’이 항일 대학생 문화예술단체를 이끄는 ‘서진연’, ‘이수한’과 손잡고 조선 최초의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는 게 이야기의 줄기다. 셋은 당초 항일 의식 고취를 위한 연극을 공연하려다 일제의 단속이 심해지자 베네치아 민중이 침략자인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는 내용의 이탈리아 오페라 ‘꿈꾸는 자들’로 대체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오페라 무대가 원흉인 일본군 장교를 암살할 절호의 기회가 되면서 서로의 갈등과 고뇌는 깊어진다. 그토록 바라던 오페라가 파행될 위기에 처하자 윤이선이 연인 서진연에게 “왜 날 때부터 우리는 희생만 해야 하느냐”며 오열할 때 관객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마침내 오페라가 시작되면 극적 긴장감이 최고로 치닫고, 놀라우면서도 안타까운 반전이 이어진다. 나라를 잃고 꿈꾸는 것조차 사치였던 암흑의 시대를 산 젊은이들의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눈물 흘리는 관객이 많다. 전체 주제곡이면서 극 중 오페라 ‘꿈꾸는 자들’의 대표 아리아인 ‘꿈의 무게’와 ‘그리하여, 사랑이여’도 심금을 울린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다. 1막 곳곳에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을 배치해 재미를 주고 후반부 감동을 증폭시킨다. 여기에 18인조 오케스트라가 받쳐주는 음악은 아름다운 넘버(노래)들과 함께 작품 전체를 풍성하게 한다. 박 작가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생기는, 온전히 혼자 짊어져야 하는 ‘꿈의 무게’를 그리고 싶었다”며 “저와 윌은 무사히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에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생기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동시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세계적 테너가 된 윤이선이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아리아 ‘꿈의 무게’를 열창하는 마지막 장면은 감동이 묵직하고 여운도 짙다. ‘가네, 멀어지네/ 빛바랜 희망이 됐네/ 나의 오 나의/ 찬란하던 꿈이여// 내겐 전부였네/ 무겁게 짓누른 데도/ 홀로 기꺼이 온전히/ 짊어졌던 꿈의 무게…’

공연장 문을 나서도 이 노래의 선율과 가사가 한동안 귓가에 맴돈다.

윤이선 역은 홍광호·박은태·서경수, 서진연 역은 홍지희·김지현·박지연, 이수한 역은 전재홍·신성민이 번갈아 맡는다. 어떤 조합이라도 작품 자체의 힘이 대단해서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은 오는 25일까지.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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