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꽃만 두고 가시오"…'침묵의 헌화' 나발니 추모현장

최인영 2024. 2. 1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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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만 두고 어서 지나가시오. 길을 막지 마시오. 머물지 마시오."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 있는 솔로베츠키 기념비 주변에서 경찰들이 확성기를 대고 끊임없이 외쳤다.

이 기념비는 옛 소련 시대 정치범 강제노동 수용소였던 솔로베츠키 수용소에 있던 돌을 옮겨다 만든 것으로, 러시아에서 정치 탄압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물이다.

경찰은 나발니 추모와 관련된 집회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기념비 앞에 꽃을 놓는 것 정도는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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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집회 금지하고 헌화만 허용…경찰 감시 속 애도 발길 이어져
모스크바 나발니 추모 장소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류반카 광장의 솔로베츠키 기념비에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모하는 꽃들이 놓여 있다. 2024.2.18 photo@yna.co.kr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꽃만 두고 어서 지나가시오. 길을 막지 마시오. 머물지 마시오."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 있는 솔로베츠키 기념비 주변에서 경찰들이 확성기를 대고 끊임없이 외쳤다.

이곳에는 전날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사망한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시민들은 이 기념비 앞에 헌화하고 잠시 애도를 표한 뒤 경찰의 경고에 떼밀리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솔로베츠키 기념비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이자 지금은 연방보안국(FSB) 산하기관 본부 쓰이는 류반카 건물 앞 광장에 있다.

이 기념비는 옛 소련 시대 정치범 강제노동 수용소였던 솔로베츠키 수용소에 있던 돌을 옮겨다 만든 것으로, 러시아에서 정치 탄압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물이다.

솔로베츠키 기념비는 어느 쪽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광장에 있지만 이날 경찰들은 기념비로 향하는 입구와 출구를 정해놓고 시민의 동선을 통제했다.

추모 공간 지켜보는 경찰들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류반카 광장의 솔로베츠키 기념비 앞에서 경찰들이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모하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다. 2024.2.18 photo@yna.co.kr

경찰들은 기념비 앞에 서서 헌화하는 시민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나발니의 죽음 뒤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자는 메시지가 온라인에서 유포되자 모스크바 검찰은 즉시 불법 시위라고 경고했다.

경찰은 나발니 추모와 관련된 집회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기념비 앞에 꽃을 놓는 것 정도는 허용했다.

말 그대로 꽃만 놓아야 한다. 그러곤 즉시 자리를 떠나야 한다.

현지 인권단체 OVD-인포는 러시아 32개 도시에 마련된 나발니 추모 장소에서 총 400명 이상이 끌려가 구금됐다고 밝혔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도 나발니 추모 집회와 관련해 신변 안전에 유의하라는 당부 메시지를 전달했다.

광장 주변에는 헌화하지는 못한 많은 사람이 솔로베츠키 기념비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서 있었다. 침묵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공기가 광장을 팽팽히 채웠다.

소형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생중계하는 유튜버, 망원 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로 촬영하는 '대담한' 이들도 있었는데 경찰이 제지하진 않았다.

나발니 추모하는 시민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류반카 광장의 솔로베츠키 기념비에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모하는 꽃들이 놓여져 있다. 2024.2.18 photo@yna.co.kr

삼엄한 감시와 영하의 날씨에도 기념비 앞에는 추모의 꽃이 점점 쌓여갔다.

양초 옆에 놓인 한 액자에는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발니는 생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암살당한다면 그만큼 자신과 지지자들이 강하다는 뜻이라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기념비 앞에 장미꽃 두 송이를 헌화한 중년 여성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무섭다"며 "그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아마도 감옥에서 살해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발니는 혹독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숨졌다. 그가 산책 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사인을 조사 중이라는 게 러시아 당국의 공식 발표다.

기념비에 헌화한 이후 약 50m 떨어진 곳에서 한참을 머물던 두 20대 여성은 "나발니가 죽어서 유감"이라고 했다.

모스크바 소재 대학교 학생이라는 그들은 "그의 죽음은 불공정하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장과 이어진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 류반카역의 지하도에서도 꽃을 든 시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주로 젊은 층이었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꽃을 들고 광장으로 향했다.

지하도에 붙은 나발니 포스터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류반카 광장 솔로베츠키 기념비 인근의 지하도에 알렉세이 나발니를 기리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 2024.2.18 photo@yna.co.kr

지하도 벽면에 몰래 붙여진 듯한 손으로 그린 포스터에는 나발니의 초상화와 함께 "언젠가 러시아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발니의 추모 공간은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붉은광장에서도 멀지 않다.

걸어서 약 10분 거리 붉은광장 앞 대로에선 다음달 대선 후보로 나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그의 얼굴이 인쇄된 깃발을 흔들거나 다른 대선 후보들의 얼굴을 해골로 바꾼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abb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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