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 사법농단 사건의 판결 읽기
법원은 사법부 독립 약화시켰다고
검찰 비난하기 앞서 반성부터 해야
섣부른 ‘농단 실체는 없다’ 결론 땐
법원은 신뢰 되찾는 길서 멀어져
사법농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르헤스는 “인간의 역사는 오해의 역사다”라고 말했다. 사실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다르다. 법은 정합성의 명제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은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무죄 판결은 세계관의 차이마저 보여준다. 사법농단 사건의 판결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2847쪽에 이르는 분량의 판결에서 인정된 수많은 사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보자. 공소사실 중에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고처분 사건 관련 직권남용’이 있다. 무지하게 긴 법원의 인정사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면 이렇다. 고용노동부로부터 법외노조 통고처분을 받자 전교조가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2014년 서울고등법원이 효력정지결정을 내리고 노동부는 대법원에 재항고를 제기했다. 당시 처분의 근거가 된 교원노조법 제2조에 대해서는 헌재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재항고 사건의 주심 대법관은 전속재판연구관의 검토보고서를 읽은 후 공동재판연구관 여러 명과 선임재판연구관에게 차례로 검토를 지시하였고, 최종적으로 헌재의 결정이 나온 후에 결론을 내기로 했다. 헌재가 2015년 합헌 결정을 하자 대법원 전원재판부는 파기환송 결정을 했다. 한편 연구관들의 검토가 계속되던 시기에 당시 기획조정실장이던 임종헌이 지시하여 심의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재항고 인용 시 청와대에 긍정적인 반대급부로 요청할 만한 사항’들로 ‘상고법원 입법 추진, 대법관 임명 제청 과정, 재외공관 법관 파견,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 법관 정원 증원 추진 등에 적극 협조’ 등이 적혀 있었다. 그에 앞서 임 실장은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부터 재항고이유서 작성에 필요한 자료 제공을 요청받자, 심의관에게 지시하여 효력정지결정의 문제점을 검토한 문서를 작성하게 하고는 법무비서관에게 보내줬다. 이 문서는 노동부에 전해졌고 재항고이유서가 되어 대법원에 제출됐다.
검찰의 공소사실은 ‘청와대가 사법부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임 실장의 보고에 따라 양승태 대법원장 등이 청와대의 요구사항에 적극 협조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임 실장이 심의관에게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며, 이는 직권남용죄의 공모공동정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판단은 이렇다. 그 보고서는 정무적 고려 차원에서 사법부의 득실을 예측하고 결정의 파급 효과 등을 분석하여 정리한 내부문건일 뿐이고 누구에게 전달된 바 없으며, 기조실장이 대법원 재판의 결론 및 처리 시기 등을 임의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나 사실상 영향력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고, 양 대법원장이 그런 방침을 정했다거나 임 실장에게 그런 지시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47개에 이르는 공소사실에서 피고인 3인과 법원행정처 간부들의 공모에 관한 재판부의 판단은 비슷한 패턴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쯤에서 보자. 전교조 사건에서 대법원장과 기획조정실장(나중에 차장으로 승진)의 직무관계, 임 실장의 법무비서관에 대한 협조, 주심 대법관의 여러 연구관들에 대한 검토 지시가 이례적인 점, 기획조정실에서 나온 보고서의 존재 사실을 보면 공모 사실은 뻔하지 않은가, 이것이 검찰의 해석이다. 그럼 이번 판결은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인가. 의심스럽다고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다, 범죄의 증명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움직일 수 없으며, 따라서 공모관계도 인정할 수 없다, 사법과정에 대한 검찰의 이해는 실인즉 오해다, 이것이 재판부의 해석이다.
이로써 끝인가? 판결은 일종의 담론이다. 문제는 판결이 아니라 그 판결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 사건을 “문재인과 김명수가 쓴 사법농단 소설”이라는 일부 언론의 언설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임종헌이란 인물이 법원행정처 차장이나 실장이란 자리에 앉아 수시로 해괴한(판결문에서 말하는 “일부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 보고서를 생산하면서 재판 간섭을 의도하던 현실은 사법부 수뇌부의 구성과 기능이 병들어 있었다는 증좌다. 검찰 힘을 빌려 이만큼이라도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도 법원의 자정 능력이 매우 낮았음을 말해준다. 법원은 사법부 독립을 약화시켰다고 검찰이나 정치권을 비난하기 앞서 깊은 반성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비하면 직권남용죄의 해석론 변경이나 월권행위에 대한 처벌 법규 제정, 공모공동정범의 인정에 관한 실무의 경향 성찰, 법관윤리 강화 등에 관한 논의는 차순위일 수밖에 없다. 이번 판결을 보고 섣불리 “농단의 실체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면, 법원은 잃어버린 국민 신뢰를 되찾는 길에서 멀어질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은 끝났지 않았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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