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 방을 비우며, 퇴직 단상

기자 2024. 2. 1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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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교에 있는 내 방을 비우고 있다. 책을 옮기고, 나누고, 치우니 이달 말에 정년퇴직이라는 걸 실감한다. 삶에 작은 매듭 하나가 더해지고, 이제 나도 노년에 들어섰음을 새삼 깨닫는다.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본다. 돌아보니 강의실 안팎으로 좋은 인연이 많았다. 가톨릭 동아리 학생들, 학내 자치 공간과 대안 문화를 고민했던 생활도서관 ‘단비(일단은 비빌 자리)’와 학교 청소노동자와 연대했던 ‘맑음’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떠오른다. ‘민들레 장학금’과 매 학기 따뜻한 차로 학생들과 함께하던 청소노동자들도 생각난다. “(중국의 양명학자) 이탁오는 사제가 아니라 사우 정도가 좋다고 합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는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신영복 <담론>) 세월이 흐르며 점점 친구처럼, 동지처럼 다가오는 학생들이 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안타까운 만남서 크게 배워

안타깝고 아쉬운 만남도 있다. 그때 그 학생은 강의실 앞쪽에 앉았다. 앞쪽에 앉는 학생은 대체로 수업 집중도가 높은 편이라 그 친구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그는 언제나 모자를 꾹 눌러쓰고 들어와 앉으면 바로 눈을 감았다. 수업을 시작해도 눈을 뜨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조는 게 아니라 ‘잤다’, 그것도 매번. 중간시험 후 어느 날 수업 태도를 강하게 지적하자 당황한 얼굴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자는 건 변함이 없었고 나도 더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즈음 학교에서 남모르는 고충을 겪는 학내 구성원의 간담회가 열렸다. 한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강의실에 앉으면 졸음이 쏟아진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자 머리에 번개가 쳤다. 다음번 수업 후 바로 그 학생을 만났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속사정을 얘기했다.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경제적 가장이다. 과외를 많이 해서 언제나 피곤하고 그래서 수업 때 깨어 있기가 힘들다. 미안하다.” 혹시나 했던 게 사실이었다. 조심스레 장학금 얘기를 꺼내자 학비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미 제적 경고를 두 번 받았고 이번 중간 성적도 나빠서 이번 학기가 마지막일 거라며 인사를 했다. 안타까운 만남이었고, 크게 배웠다. ‘待人春風 持己秋霜’, 다른 사람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자기는 가을 서리같이 엄격하게 대하라. 남의 행위는 잘 보이지만 그 처지는 잘 보이지 않으니 남의 잘못을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되지만, 현실은 대개 거꾸로다. 최근의 ‘디올백’ 논란에서 보듯이 남에게는 칼같지만, 자기에게는 너그럽기 짝이 없는 게 요즘 세태다.

올해 정년이라고 하면, 이제부터는 뭘 할 거냐고 묻는다. 무엇을 새롭게 할까 생각해보진 않았다. 내 소속 수도회인 예수회에서도 아직 별다른 말은 없다. 예수회 대학인 서강대학교에서 일하며 신부와 교수라는 정체성이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하지 않고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믿었고 나름대로 그렇게 애썼기에 퇴직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계속 신부로 지낼 테니까. 오히려 더 자유롭게 하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홀가분함이 크다.

진리·생명의 빚 갚으며 살았으면

정년(停年)은 ‘멈추는 해’라는 뜻으로 성서의 ‘안식년’과도 통한다. ‘안식’도 어원상 멈춘다는 뜻이다. 일곱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은 경작을 멈추고 땅을 묵히는 때다. 묵힌 땅의 소출은 모든 생명체의 양식이다. 안식년은 경작을 멈추어 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살리는 때다. 그런 안식년이 대학에서 언제부턴가 연구년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의 수렁에 빠진 대학은 안식년에도 멈추지 말고 연구 성과를 내라고 닦달한다. 자본주의에서 멈춤은 생소한 말이다. ‘24시간 연중무휴’가 웅변하듯 더 많은 생산과 이윤으로 끊임없이 자기 증식에 급급한 자본의 축적 운동은 멈춤을 용납하지 않는다.

첫 번째 안식년에는 길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일상을 멈추고 길을 나서 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의 인연으로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을 함께 만들었고 ‘녹색연합’도 만났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어려운 시절이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마저 포획한 자본주의는 무소불위의 힘을 떨친다. 철벽처럼 강고한 현실을 바라보면 무력해질 때가 많지만, 어떻게든 함께 살자고 애쓰는 이들 덕분에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지탱된다고 믿으며 마음을 추스른다.

서강대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학교의 상징물인 ‘알바트로스탑’이 하늘로 우뚝 솟아 있고 탑 가운데에 ‘OBEDIRE VERITATI’, 진리에 순종하라는 교훈이 보인다. 성서에서 진리는 사랑과 생명과 통한다. 이제 정년이라는, 기한 없는 안식년을 시작한다. 멈추면 바삐 지나가느라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더 잘 보이니, 학교에 있을 때 밀렸던 진리와 사랑과 생명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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