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청산이 ‘시대정신’이라니
[한겨레 프리즘] 조혜정 | 정치팀장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참 세련됐다. 몸에 꼭 맞춘 양복에 지적인 느낌을 주는 뿔테 안경,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 없는 답변, 너무 똑똑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 것 같은데 시장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학교 빼먹은 거 아니냐”고 걱정하며 호떡을 사주는 다정함까지,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그런데, 한 위원장의 시대인식은 아직 2024년으로 따라오지 못한 것 같다. 지난달 31일, 과거 1970~80년대 운동권이었다가 전향한 이들이 주축인 민주화운동동지회 등이 연 토론회에 보낸 축사에서 한 위원장은 “86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그에 앞서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지난해 12월26일에도 한 위원장은 “운동권 특권”이라는 표현을 일곱 차례나 사용하며 이들을 청산해야 한다면서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향한 혐오와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운동권 청산’이 ‘시대정신’이라니, 한 위원장과 내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맞는가 싶었다.
한 위원장은 국회의원이나 정부 요직을 지낸 민주당의 80년대 학번 정치인들을 ‘운동권 특권 세력’이라고 부른다. 86세대가 정치권에 처음 집단적으로 진출한 건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다. 당시 정치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새 피’를 수혈한다며 이들을 영입했고, 10여명이 당선됐다. 당시 영입된 이들 중 일부는 한 위원장 말대로 “386이 486이 되고 586, 686이 되도록” 정치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20년 넘게 정치를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 아직도 ‘운동권’이라고 하는 건 적확하지 않다. 3선인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경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한 위원장 논리대로라면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도 ‘운동권 특권 세력’으로 청산 대상에 해당한다. 원 전 장관은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에 투신한 경력을 인정받아 2000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공천을 받았고, 이후 3선 의원에 재선 제주지사, 장관까지 지냈다. 그럼에도 한 위원장은 원 전 장관을 이재명 대표의 대항마로 추어올렸고, 원 전 장관은 인천 계양을에 출마해 4월 총선에서 4선에 도전한다.
머리 좋기로 소문난 한 위원장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왜 팩트도 빈약하고, 논리도 조악한 시대정신론을 꺼내 든 걸까. 한 위원장이 ‘영입인재 1호’로 모신 박상수 변호사가 지난해 페이스북에 쓴 글이 한 위원장을 이해할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2040 청년들이 왜 분노하고 있냐는데, 기성세대가 약속한 최상단의 코스를 밟아도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아이 기르고 집 한 채 마련하는 것도 보장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0년대생 이상 꿀빨러(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이득을 본 사람)들은 (청년들을) 이해할 생각도 없다.” 86세대가 모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는 바람에 이후 세대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이른바 ‘꿀 빤 세대론’이다.
이는 여러 통계와 분석으로 사실이 아니라는 게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그럼에도 ‘꿀 빤 세대론’은 극히 일부 사례에 불과한 ‘성공한 586 상층부’를 일반화해 청년들의 증오를 부추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책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민주당·진보·좌파를 비난하는 86세대 담론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불공정 현실에 대한 청년의 분노를 정치·이념 투쟁의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는 물길”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갈라치기’는 적을 분명히 하고 우리 편을 공고히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한 득표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한 위원장이 취임식에서 말했던 “좋은 나라 만드는 데, 동료 시민들의 삶을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는 게 진심이라면, 그가 읽는 시대정신은 달라져야 한다. 최악의 불평등, 여전한 노인 빈곤, 길 잃은 국정운영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은 널렸다.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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