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로의 인류세 관찰기] 지금 필요한 건, 석유와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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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걸.
1990년 900억t이었던 중동 원유 매장량은 2010년에 1000억t, 이제는 1100억t을 웃돈다.
1990년부터 30년 간 인류가 중동에서 퍼다 쓴 기름이 370억t이 넘는데도 발 아래 기름은 자꾸 늘어난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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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1 이제 보니 중동 기름밭이야말로 화수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1990년대 초,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얘들아, 자원을 아껴야 한다. 석유는 유한해서 얼마 안 가 고갈될 거거든.” 그 무렵 신문엔 2050년에 석유·가스가 바닥나 인류 최대 위기가 닥칠 거라든가 10년 안에 석유생산은 내리막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둠스데이’ 류의 기사가 왕왕 등장했다.
그런데 웬걸. 1990년 900억t이었던 중동 원유 매장량은 2010년에 1000억t, 이제는 1100억t을 웃돈다. 1990년부터 30년 간 인류가 중동에서 퍼다 쓴 기름이 370억t이 넘는데도 발 아래 기름은 자꾸 늘어난다. 이게 다 돈인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2 가장 치사한 말싸움 수법은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다(내가 부부싸움할 때 주로 동원하는 전술이기도 하다).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예민? 내가 지금 별것도 아닌데 괜히 시비 건다는 거야?”-“그런 뜻이 아니잖아”-“꼭 나를 이렇게 이상한 사람 만들더라”… ‘예민’이란 단어가 얼마나 문제적인지 한껏 부풀려 논점을 일탈시킨 다음 상대를 코너로 몰아넣으려는 쩨쩨한 방법이다.
국제 협상장에서도 단어 하나, 토씨 하나를 놓고 격전이 펼쳐진다.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폐지하자” -“줄인다고 해도 될 걸,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줄이는 걸로 지구를 구하겠어?”-“듣고 보니 우리를 기후악당으로 몰아가네. 너무 한 거 아냐?”… 국제 협상에서는 ‘폐지든, 감축이든 뭣이 중헌디…’ 하고 눙치고 넘어갈 수가 없다. 몇 글자 단어에 나라의 명운이 달려서다.
지난해 말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바로 이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폐지’와 ‘감축’의 팽팽한 접전 끝에 ‘화석연료에서 멀어진다’는 애매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마터면 사막 아래 그 많은 기름을 상장 폐지된 주식처럼 들고 있을 뻔했던 중동 산유국은 한숨을 돌렸다.
플라스틱 국제 협약을 위한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제사회는 플라스틱 오염을 끝내자는 합의문을 연내 마련할 계획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화수분을 품은 나라(사우디아라비아, 이란…)는 “플라스틱 재활용 체계를 잘 구축해 투기·소각되는 양을 줄이자”고 말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 세계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9%에 불과하고, 지금 추세라면 플라스틱 생산량은 2060년쯤 3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전체 파이가 커지면 재활용에 떼어주는 몫이 좀 늘어난들 원유 수요는 꾸준할 것이다. 연료(휘발유, 발전연료) 시장이 줄어드는 판에 원료(나프타) 시장까지 쪼그라드는 건 화수분 국가에 악몽 같은 일이다.
#3 한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석유로 많은 돈을 벌었다. 원유를 들여와 정제하고 각종 석유 제품을 팔아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유·석유화학 산업을 일궜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국은 ‘야심찬 목표연합(HAC)’에 이름을 올렸다. 국제 플라스틱 협상장에서 “1차 플라스틱 폴리머(거의 대부분 석유 추출 원료로 만든다)를 덜 만들고, 덜 쓰도록 구속력 있는 조항을 만들자”고 하는 이른바 강경파다.
그런데 ‘에이치에이시 회원국’ 한국의 입장은 “일률적 생산 규제보다는 나라별 실정에 맞게 하자”는 것이다. “(회원 가입은) 대의에 공감한다는 뜻이에요. 사실 플라스틱 협약이 오염 방지가 목적이라 1차 플라스틱 생산 문제와는 뉘앙스가 좀 다르죠.” 정부 관계자 말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도 정확히 이렇게 말한다. 오염이 문제면, 오염에만 집중하자고.
석유 없는 세상을 문명의 종말로 보던 때가 있었다. 세상이 변해 지금은 몇몇 산유국을 빼면 석유와 멀어져야 다같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걸어갈 방향이 어느 쪽인지 답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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