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약탈당하던 나라에서 전파하는 나라로

조상인 백상경제연구원 미술정책연구소장 2024. 2. 1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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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반출 막는 '보호법' 작년 개정
'전시 목적'은 수출 가능···시행령도 공포
해외박물관 한국실의 풍성한 전시 기대
고미술 위작·등록문화재 등은 과제로
[서울경제]

박서보 댁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해 10월 타계한 고인은 1970년대 한국의 단색조 추상미술인 ‘단색화’를 이끌었던 인물로, 국내외를 누비며 말년에도 왕성하게 활동한 화가다.

“1974년에 제작된 작품은 이제 해외로 못 나가는 건가요? 외국 미술관에서 작품 소장 문의가 많아요. 미술관 보드 멤버(이사)가 구입해서 미술관에 기증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가능한가요?”

며칠 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박서보재단으로 갔다. 지난해 개정된 문화재보호법과 연말에 공포된 시행령까지 출력한 서류뭉치를 챙겼다.내용은 이렇다.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 중 제작된 지 50년이 지나고도 상태가 양호한 경우 희소성·명확성·특이성·시대성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하면 ‘일반동산문화재’로 분류된다.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잠재적 문화재’의 요건을 갖췄다는 의미다. 박서보의 1974년 작이 딱 이 경우다. 지난해 1월 서울경제신문이 현행 문화재보호법의 여러 문제점을 기획 기사로 지적한 후 문화재청은 ‘생존인의 작품은 국외 반출 금지 대상의 예외로 하는 조항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해 8월 개정 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박서보는 법률 개정의 혜택을 잠시 누렸지만 작가 별세 이후 다시금 세부 조항을 살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은 해방과 전쟁을 거친 우리나라가 문화재 약탈과 무분별한 반출로부터 우리 것을 지키고자 한 목적이었기에 상당히 보수적이다. 한동안 유효했으나 시대가 변했다. 이른바 ‘K컬처’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문화유산을 약탈당하던 나라에서 전파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국격이 달라졌다. 미국 유명 미술관의 큐레이터 A 씨는 “미국 내 미술관도 젊은 관람객을 더 많이 끌어들이고자 애쓰는데 ‘한국’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관람객 수가 쑥 느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달 방한한 미국 동부의 한 대형 미술관 디렉터 B 씨는 신경균 도예가의 달항아리를 끌어안더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게 K컬처의 힘이다.

개정된 법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했고 지난 연말 공포된 시행령은 이를 촘촘히 챙겼다. 개정법 60조 일반동산문화재 수출 등의 금지 조항이 대폭 달라졌다. 이제는 ‘외국 정부가 인증하는 박물관이나 문화유산 관련 단체가 자국의 박물관 등에서 전시할 목적으로 국내에서 일반동산문화유산을 구입 또는 기증받아 반출하는 경우’ 작고 작가의 50년 이상 된 작품도 수출이 가능하다. 갤러리나 아트페어 전시를 위한 반출은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사전예약감정’ 신청을 통해 출국 서류와 유물 정보를 입력하면 가능하다. 돌아가신 김환기나 곽인식의 작품, 살아 있는 이승택이나 김구림의 초기작도 큰 어려움 없이 ‘통과’다. 해외 박물관·미술관에서 중국실·일본실에 비해 유난히 초라했던 한국실이 풍성해질 것이다.

숙제가 남았다. 하나는 100년 지난 고미술품에 관한 문제다. 최근 몇 년 새 우리 고미술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급증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에서 조선 후기 달항아리가 60억 원, 48억 원에 각각 낙찰됐다. 현재 메트로폴리탄·덴버 미술관에서 한창인 한국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연계한 전시도 인기다. 고미술 업계에서는 해묵은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시장 위축과 가격 저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해왔다. 법 때문만이 아니다. 위작 유통, 진위 및 가격 감정에 대한 낮은 신뢰도가 문제다. 자체 정화 시스템과 외부 감시 기구 등 고미술의 진위 논란을 극복할 방안이 요구된다.

이제 막 교류의 길이 열린 근대기 문화유산에 대한 등록문화재 지정 검토도 필요하다. 등록문화재란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보존과 활용을 위한 가치가 높다고 판단돼 지정·관리하는 문화재를 말한다. 아라리오미술관으로 변신한 건축가 김수근의 옛 ‘공간사옥’이나 지난해 ‘헤레디움’으로 개관한 옛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 등이 국가등록문화재다. 미술 작품으로는 고종의 접견실인 창덕궁 희정당 벽화 등 궁궐 장식화 6점이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농촌 풍경을 그린 이상범의 ‘초동’(1926), 김환기의 초기 추상화 ‘론도’(1938), 한국적 인상파 오지호의 ‘남향집’(1939) 등 6점이 2013년에 등록문화재로 이름을 올렸다.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문화재보호법도 유연하게 바뀐 지금, 새롭게 등록문화재를 점검할 때다. 작가 또는 유족이 생존해 있고 역사적 판단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라 논란과 잡음이 생길 수도 있는 사안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조상인 미술정책연구소장
조상인 백상경제연구원 미술정책연구소장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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