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추모객까지 연행…푸틴 정권, 주검도 가족에 안넘겨

신기섭 기자 2024. 2. 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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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민주 진영의 종말” 애도
푸틴 측근들, 국제 고립 심화 우려
정부, 폐쇄·배타성 강화 선동 나설 전망
러시아 모스크바의 소련 시절 정치범 기념 시설 근처에 마련된 알렉세이 나발니 추모 공간에 17일(현지시각) 한 여성이 꽃을 바치고 있다. 모스크바/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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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표적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7)가 옥중에서 갑자기 숨지면서, 폭압 통치를 이어가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권의 ‘정당성 위기’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러시아의 국제적인 고립도 심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실마리를 찾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나발니가 수감 중이던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의 교도소에서 지난 16일(현지시각) 갑자기 숨진 뒤 모스크바에 마련된 임시 추모 공간에서 조용한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등 러시아 전역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17일 보도했다. 러시아 인권 단체 ‘오브이디(OVD)-인포’는 이날 오후까지 전국 36개 도시에서 추모객 401명이 경찰에 연행됐다고 밝혔다.

추모객들은 강한 분노와 절망감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추모 공간에서 헌화한 블라미디르 니키틴(36)은 로이터 인터뷰에서 “나발니의 죽음은 끔찍하다. 희망이 산산조각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추모객은 “나는 그가 미래에 뭔가를 이뤄낼 인물로 기대해왔다”며 죽음을 애도했다. 추모 공간에는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쓴 쪽지 등이 붙어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2000년 정치에 뛰어든 나발니는 정부의 부패와 인권 탄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생사를 오가는 위기를 넘기며 푸틴 대통령에 맞서는 러시아의 양심으로 큰 이목을 끌어왔다. 2020년 8월 20일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독극물 중독 증상으로 의식을 잃은 뒤 독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망명하는 대신 이듬해 1월17일 귀국을 택했다. 많은 이들의 우려대로 러시아 정부는 2014년 금품 불법 취득 혐의로 내려진 유죄 판결의 집행유예 결정을 취소하며 그를 옥에 가뒀다. 그 뒤 극단주의 선동 등의 혐의로 30년 넘는 징역형에 선고됐다. 나발니는 옥중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등 정부 비판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된 민주 진영의 종말로 이어질 거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콘스탄틴 소닌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정치경제학)는 “이제 러시아에서 푸틴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떻게 가능할지 불분명하다”고 우려했다.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는 최장 30일 동안 그의 사망에 대한 ‘절차적 검토’에 들어가겠다며 주검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사인을 은폐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크렘린궁(대통령궁) 안팎에서도 현 상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 독립 언론 메두자는 크렘린궁의 정치 전략가와 집권 여당 ‘통합러시아당’의 관계자들이 내달 15~17일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사태가 푸틴 대통령에게 ‘아주 부정적인 상황’이 될 것으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들 역시 “(푸틴) 대통령이 (서방으로부터) 또 다시 손에 피를 묻힌 독재자이자 살인자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식통들은 서방 국가에서 나발니 사망 이후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만 2년째를 맞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의 가능성도 거의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실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나발니 사망 소식이 알려진 직후 “나발니의 죽음이 푸틴과 그의 깡패들이 한 어떤 행동에 따른 결과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나발니의 죽음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을 묻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교장관 역시 서방 주요 7개국(G7)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대응 조처를 검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반체체 인사들은 서방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러시아 민간 석유 회사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전 회장은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쓴 글에서 3월 대선에서 푸틴이 재선하더라도 서방 국가들은 절대로 결과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서방이 푸틴과 어떤 접촉을 하더라도 평화 시도를 이끌어 낼 수 없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력한 군사 지원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발니의 죽음은 러시아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더욱 재촉할 전망이다. 메두자는 푸틴 측근들의 말을 인용해 정부가 나발니가 숨질 때를 대비한 대응책을 이미 준비해뒀다고 전했다. 이들은 러시아 정부가 ‘서방이 극단적 반정부 인사의 죽음을 계기로 푸틴에 타격을 주려 요란을 떤다’, ‘나발니의 죽음은 서방만 이롭게 할 것이다’, ‘러시아 내 강경파가 나발니를 제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좌초시켰다’ 등의 주장을 동시 다발적으로 퍼뜨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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