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우크라이나 침공 2년, 김정은의 ‘롱 게임’
박민희 | 논설위원
2년 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우리가 익숙했던 세계는 사라졌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멈추지 않고 있는 참혹한 전쟁은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키고 있다.
질서의 균열을 가장 과감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김정은은 가장 먼저 가장 분명하게 ‘러시아 편’을 선택했다. 2022년 2월28일 유엔 총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와 주권 침범을 비판하면서 러시아가 즉각, 완전히, 무조건 철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는데, 여기에 반대표를 던진 7개국 중 하나가 북한이다. 중국은 기권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김정은은 자신을 전략의 천재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2019년 2월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김정은은 이제 북한 역사상 가장 유리한 국제정세 위에서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느 때보다도 대담해졌다. 그는 핵과 미사일 능력을 거침없이 강화하고, 한국은 ‘동족이 아닌 영원한 주적’이라고 선언하고 위협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달 “김정은이 전쟁을 할 전략적 결심을 했다”는 미국 전문가 로버트 칼린과 지그프리드 해커의 경고가 나오고, 북한이 서해 연평도와 백령도 일대에서 포 사격을 하면서 전쟁 위기론이 급속도로 고조되었다. 금융 시장도 출렁거렸다. 그 전까지 북한의 도발에 ‘즉시, 강력하게, 끝까지 응징한다’며 자신만만하던 신원식 국방장관은 순식 간에 말을 바꿔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며 북한이 전쟁을 벌일 리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이 전쟁에 필요한 포탄 수백만발 등을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으니 전쟁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신 장관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북한의 전략을 과소평가하고,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좁은 시야와 단순한 논리에 갇혀 있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북한은 10년 이상 미래를 바라보며 ‘롱 게임’을 하고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 실패 이후 김정은의 전략은 ‘미국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 발사 미사일에 탑재한 핵으로 위협해 한반도에 개입하기 어렵게 하면서, 한국을 전술핵으로 위협해 무력 점령, 또는 종속국가로 만들 기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력을 생각하면, 제 정신이 아닌 허풍으로 여길 만하다.
그런데, 김정은은 지난 1월 ‘겨우’ 마흔살이 되었다. 임기도 없다. 이제 열살인 딸 주애에게 20년 뒤쯤 부강해진 국가를 물려주겠다는 ‘강국몽’을 키워가고 있다. 김정은은 2021년 1월 노동당 당대회에서 신형 전술핵무기 개발을 지시했고, 전술핵 운용부대를 편성해 한국의 주요 시설들을 겨냥한 전술핵 공격 훈련을 계속했다. 2022년 9월8일에는 핵무력 정책법을 제정해 핵 선제 사용 조건을 명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를 속전속결로 점령해 친러시아 정부를 세우려던 러시아의 초기 전략이 실패하고 장기전의 수렁에 빠진 푸틴이 북한과 손을 잡았다. 북한만이 러시아에 대규모로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국가였고, 미국에 함께 대응하겠다는 전략적 필요성도 컸다. 2023년부터 북한은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을 급속도로 강화하면서, 군사, 경제, 외교적으로 매우 유리한 입지에 서게 되었다. 러시아로부터 무기 판매 대금과 노동력 파견 등으로 경제 상황도 개선되고, 첨단 군사기술도 넘겨받을 수 있다.
북-러 밀착으로 대담해진 김정은에게 국제 정세가 계속 북한에 유리한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지지구에서 미국은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주도 국제질서에 균열이 계속 깊어지고 있다. ‘돈을 제대로 내지 않는 나토 동맹은 러시아가 마음대로 (침공)하도록 부추기겠다’고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가 실제로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재선된다면, 미국의 동맹 구조의 앞날은 장담하기 어렵다. 한미동맹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단금 대폭 인상 요구, 주한미군 철수 위협, 미국 전략무기 전개의 거액의 비용 청구 등으로 크게 흔들릴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집권한다면 동맹들은 시간을 벌겠지만, 커져가는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 때문에 미국의 안보 우산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생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변수는 중국을 얼마나 가깝게 끌어들일 수 있느냐이다. 현재로서 중국은 북-러 밀착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북한 관리’를 미국과의 협상에서 카드로 쓰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대만 문제가 위태로워질 수록, 중국에서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은 커지게 된다.
김정은은 일본에도 문을 열고 있다. 일본이 북한과의 대화 명분으로 ‘납치 문제 해결’을 앞세우는 것은 국내 정치적 필요 때문이지만, 그 뒤에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날로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북한과 대화 채널을 열어야 일본의 안보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있다. 미국도 북한 관리를 위해 일본의 대화 시도를 지지한다. 북한은 한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에 대화 신호를 계속 보낼 것이다.
북한은 유라시아 동서의 정세, 국제질서의 장기적 흐름을 종합적으로 읽으면서 ‘롱 게임’을 벌이고 있다. 올해 연평도·백령도 북쪽 해역에서의 도발을 예고하고 있고, 한국에 대한 도발과 위협 수위를 계속 높여 갈 것이다. 한국이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정교한 전략을 마련하고 자강 능력을 키워간다면, 대비할 시간과 능력은 있다. 김정은의 계획을 ‘평화적 공존’으로 바꾸게 만들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북한을 과소평가하는 철지난 ‘북한 붕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만 계속 외친다면 한국에 남아 있는 기회와 능력마저 사라져버릴 것이다.
minggu@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속보] 전공의 715명 사직서 제출…정부 “업무개시명령, 엄정 대응”
- 나발니 죽음 꼬리 문 의혹…혹한의 감방·독극물 중독·의문의 주사까지
- “대통령에 항의도 못하는 독재국가냐”…“카이스트 ‘입틀막’은 직권남용”
- 안형준 사장 “MBC 민영화, 현실적으로 불가능…길들이기 시도”
- 쓰면 영상 되는 ‘소라’ 출시에 광고·영상 업계 “우리 다 죽었다”
- 귤껍질 일반쓰레기로 버렸다가 과태료 10만원…“기준 헷갈려요”
- 월요일 비 많이 온 뒤 기온 ‘뚝’…눈비 오는 축축한 한 주
- 쿠팡만 블랙리스트 의혹 있는 게 아니다…“이 바닥 좁아” 그 한마디
- 진격의 비야디, 전기승용차 3분기에 한국서 달린다
- 고발 사주 사건이 드러낸 ‘검찰국가’의 민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