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노원명 에세이]
트럼프가 빈털터리가 되는 것과 올해 연말 그가 미국 대통령 자리에 다시 앉는 것의 연관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 사법리스크에 좌우될 트럼프였으면 지금 저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한다. 트럼프를 중도하차시킬 유일한 사법리스크는 연방대법원이 그의 대통령 후보자격을 문제 삼는 것인데 지금 연방대법원은 보수 우위여서 가능성이 높지 않다.
6개월전에 내기를 했다면 나는 ‘트럼프 컴백’에 베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당연히 컴백에 건다. 선거는 바람의 세기로 결정되는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바람은 사법리스크에 아랑곳없이, 커지는 리스크를 비웃듯 더 강하게 몰아치는 특성이 있다. 그에 비하면 바이든이 등진 바람은 하품이 나오는 바람이다. 이 바람을 키워서 태풍을 만들기에 바이든은 너무 매력이 없고 더 큰 문제는 본인이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나토가 해체되고 한미, 심지어 미일동맹까지 위태로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런 논의가 좀 따분하게 느껴진다. 4년 전 미국 대선 때는 바이든이 당선되면 ‘우리가 아는 미국이 그래도 좀 더 버티겠지’하는 기대가 있었다. 지난 4년,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우리가 아는 미국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오직 허울만이 남아있는데 민주당이 끌어가는 미국은 그 허울에 집착하고 트럼프는 벗어던지려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아는 미국’은 20세기초 우드로 윌슨에서 시작해 소련붕괴 언저리까지 그러니까 약 70~80년 가량 존속했던 미국이다. 그나마 빌 클린턴과 조지 W.부시까지는 그 끝물의 영향이 미쳤던 시대이고 버락 오바마부터는 ‘우리가 모르는 미국’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다만 세계는 관성으로, 그 공백의 허허로움을 견디지 못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국을 그려놓고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연극을 해오고 있다.
윌슨이 씨 뿌리고 2차대전후 성인이 되어 21세기 초에 운명을 다한 미국을 정의하라면 ‘이기심에 지배되지 않은 역사상 유일한 국가’로 요약하고 싶다. 윌슨 이전의 미국은 고립된 국가였다. 그들은 세계가 강대국들의 세력균형에 의해 유지된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덩치에 걸맞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상주의자였던 윌슨은 이런 ‘속물주의’를 경멸했다. 그는 미국의 역할을 “우리의 이기심이 아니라...우리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미국의 소명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을 넘어서 독립과 권리를 지키려는 모든 국가의 편에 서서 싸우는데 있다고 선포했다.
하나의 이상이 당대에 꽃 피우는 경우는 드물다. 윌슨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대중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미국은 고립주의 국가로 남았다. 심지어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2차대전 초기에 히틀러와 싸우는 영국을 지원하자는 말을 꺼내기 주저했다. 그는 미국의 소명을 이해했지만 대중이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 문제였다. 진주만 공습이 없었다면 미국의 참전은 더 늦춰졌을 것이다.
2차대전후 시작된 냉전을 계기로 미국은 마침내 ‘자유의 등불’로 세계에 등장했다. 조지 케넌이 정초한 ‘봉쇄정책’의 기본 콘셉트는 공산세력이 도발하면 어느 지역에서나, 자원이 얼마나 들든, 언제까지나 방어한다는 것이다.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것 이외에 어떤 상호주의적 보상도 파트너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이 터무니없이 도덕주의적인 정책은 유럽에서 마셜플랜과 베를린 공수작전 등을 통해 구체화했다.
더 놀라운 것은 6.25 참전결정이었다. 당시 미국 전략의 초점은 서유럽이었다. 남한은 미국의 방어선 안에 있지도 않았다. 왜 트루먼은 그런 남한에 군대를 보냈을까. 그것은 트루먼을 비롯해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이익을 지정학적 이해가 아니라 도덕적 원칙 차원에서 이해했음을 시사한다. 그 원칙이 무너졌을 때 입을 위신의 손상을 국가이익의 침해로 받아들이는 미국적 사고방식을 스탈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의 참전에 가장 놀란 것이 스탈린이었다.
그후로도 미국의 ‘도덕 성전’은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단속적으로 이뤄져 왔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가 됐다. 대부분의 전쟁은 미국의 안보나 경제에 직결되지 않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미국은 그들이 숭배하는 자유주의적 이상이 위협받는다고 판단될 때 세계의 오지로 군대를 보냈다. 역사상 그런 전쟁을 한 패권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그런 미국은 이제 세상에 없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이후 항복하지 않을 만큼만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오고 있다. 전쟁판도를 바꿀 고사양 무기는 주지 않는다. 그나마 미국 의회가 추가지원 예산안 통과를 미적대면서 신규지원은 끊긴 상태이고 우크라이나는 계속 밀리고 있다. 트루먼의 시대였다면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미온적인 것은 우크라이나가 나토회원국이 아닌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러시아가 나토회원국인 리투아니아나 에스토니아를 침범했을 때 미국은 과연 더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설까. 트루먼 시대였다면, 아니 조지 W. 부시까지만 하더라도 나토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도덕적 언명이 상대의 도발 즉시 행동으로 전환하리란 믿음이 존재했다.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아마 가장 궁금한 사람은 푸틴일 것이다. 예전엔 언감생심 꿈도 못꿨겠지만 지금은 테스트해 보고 싶을 것이다.
돈을 내지 않으면 나토회원국을 러시아로부터 보호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최근 발언은 으름장이라기보다는 현실인정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토의 친구들이 돈을 충분히 낸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빠지고 싶을 것이다. 지금 트럼프를 비롯해 많은 미국인들은 다시 고립주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이미 배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유럽의 일을 자신의 일과 동일시하던 시대는 도덕적 가치 수호를 국익으로 간주하던 시대였다. 그 기억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 조만간 시야에서 벗어날 시점이 온다. 트럼프가 다시 조타수가 되면 그 시점이 좀 더 당겨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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