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지금까지 내가 알던 건 '뿌리'였을 뿐! 새롭게 발견한 당근의 삶
채식을 하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채소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경험들을 자주 한다. 새롭게 발견한 채소들 중에서도 예전과 가장 큰 간극이 있었던 채소는 바로 '당근'이다. 사실 당근만큼 흔한 채소도 없다. 무릇 많은 채소들이 그렇듯 당근 역시 메인 요리에 곁들이거나 장식을 위해 쓰이지만 그중에서도 당근은 요리에 활력을 더하는 주황색을 담당한다. 채쳐지고, 다져지고 조각되어 각종 볶음, 동그랑땡, 김밥, 찜 등에 폭넓게 사용된다.
마치 여러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낯익은 조연 같다. 독특한 캐릭터로 주인공의 가까운 사람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막상 그의 배경이나 서사는 공개되지 않으며 딱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당근을 알았던 것도 딱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채식을 하면서 어떤 경험들로 당근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유기농이 환경에 이롭다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가급적이면 무농약, 유기농 채소를 먹기로 결심했을 때였다. 한살림에서 흙이 묻어 있는 당근을 사 와서는 열심히 씻고 손질을 했다. 동그랗게 단면으로 썰어 한 조각을 먹어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당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채소에서 흔하게 느낄 수 없는 달달한 맛과 아삭하게 씹을수록 당근 고유의 짙은 향이 약간의 수분과 함께 배어 나왔다. 맛, 향, 식감 모든 면에서 예전에 경험했던 당근에 비해 몇 배는 짙고 생생했다. 정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유기농 흙에서는 화학비료, 제초제, 농약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미생물과 유기물질이 훨씬 풍부하고, 그렇기 때문에 미생물이 풍부한 환경에서 채소 본연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고 한다. 퀘벡의 유기농부 장-마르탱 포르티에의 책에서도 유기농과 유기농이 아닌 것의 맛을 즉시 알아차리기 쉬운 채소가 당근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유기농 당근이 맛있는 것은 나만의 경험은 아닌가 보다. 당근의 진정한 맛을 알고 싶다면 무농약, 유기농 당근을 먹어보기를 추천한다. 또는 제철 당근을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당근은 많은 비료나 농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물이기도 하고, 추운 겨울의 땅속에서 더욱 달아진다고 하니 제철 당근이 맛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근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두 번째 계기는 당근을 기르면서 찾아왔다. 몇 년 전 당근 씨앗이 생겨 화분에 당근을 길러보았다. 당근을 직접 길러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열심히 물을 주고 가꾸었다. 나는 당근의 잎에 매료되고 말았다. 잎은 딜의 잎보다 조금 더 넓적하고 짧았으며, 줄기는 셀러리의 가장 얇은 줄기 정도 두께로 길고 곧게 뻗어 올랐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모습이 꼭 코스모스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흙 위로 피어난 잎과 줄기의 모습으로 봐서는 뿌리에 그렇게 강렬하고 짙은 향을 가졌을 것은 모습이 연상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당근의 잎과 줄기를 본 적이 없었고 흙 속에 감춰진 뿌리만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야생에 자라난 당근의 잎과 줄기만 봐서는 당근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당근의 '뿌리'에 불과했다. 당근의 삶의, 지극히 일부만을 알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지난날들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다. 지금도 당근의 뿌리를 볼 때면 어딘가에서 하늘을 향해 뻗은 잎과 줄기를 가졌을 모습을 떠올린다.
당근이 유명한 조연이 된 비결은 색뿐만 아니라 영양에도 있을 것이다. 당근에는 베타카로틴이 듬뿍 들었다. 베타카로틴을 섭취하면 체내에서 필요한 만큼 비타민A로 전환된다. 비타민A는 눈, 피부, 코의 점막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타민이다. 베타카로틴은 대부분 당근의 껍질에 있기 때문에 베타카로틴을 효과적으로 섭취하고 싶다면 껍질째 먹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름에 볶거나 함께 섭취하면 흡수율도 높일 수 있다.
당근이 주인공인 레시피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이 고국의 김치를 그리워하며 만들어 먹었다는 당근 김치. 맛있어서 러시아, 중앙아시아로 퍼져 '한국 당근 샐러드'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원래 레시피에는 이국적인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지만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기본적인 양념만으로 만들었다. 살짝 매콤하면서도 아삭함, 달달하며 새콤한 맛이 좋아 어디든 잘 어울리고 특히 빵과 잘 어울린다.
- 재료: 당근 2개, 양파 1/2개, 마늘 3알
- 양념: 소금 2/3T, 설탕 1T, 식초 1T, 고춧가루 듬뿍 1T, 식용유 3T
*1T는 밥숟가락에 평평하게 담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
당근은 채칼로 썰어 소금에 버무린 후 20분 정도 절인다. 예열한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채 썬 양파와 다진 마늘을 볶다가 고춧가루를 넣어 볶는다. 절인 당근의 수분은 살짝 제거하고 나머지 양념과 볶은 고춧가루 양파, 마늘을 넣어 버무린다. 냉장고에 넣어 6시간 이상 숙성시킨 뒤 먹는다.
2. 당근 미나리 김밥
당근과 미나리는 같은 미나릿과 가족이다. 당근을 채 썰어 볶아 달달하고 그윽한 풍미와 산뜻한 미나리의 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비타민 듬뿍 김밥이다. 미나리 무침은 만들면 수분이 생기기 때문에 먹기 직전에 바로 버무려야 하고, 남은 무침은 김밥 위에 추가로 올려 먹어도 맛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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