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살의 조력사…누가 ‘존엄한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초고령화 시대 국가적 서비스
가깝고 암울한 일본의 미래 배경
동명의 단편에선 “저소득층 타깃”
쓸모로 생사가 결정되지 않을지…
2022년, 장뤼크 고다르가 세상을 떠났다. 조력사였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고다르는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고, 여생을 보내던 스위스 법이 허용하는 의학적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선택의 바탕에는 스스로 “살 만큼 살았다”는 명확한 의식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고다르는 자신이 어떻게 생의 끝에 도달했는지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랐다. 영화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감독은 스스로 조력사가 불법인 프랑스 사회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기를 의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령화 사회 구할 유일한 방법?
그즈음 한국에서는 ‘다 잘된 거야’(2021)가 개봉 중이었다. 또 한명의 대표적인 프랑스 감독인 프랑수아 오종이 연출하고 소피 마르소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엠마뉘엘은 어느 날 아버지 앙드레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앙드레는 깨어나긴 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평생 대쪽 같은 자존심으로 살아온 그는 그런 ‘망가진’ 상태를 견딜 수가 없다. 앙드레는 딸에게 “끝내고 싶다,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엠마뉘엘은 번뇌에 시달리지만 결국 “나답게 죽고 싶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가족은 스위스행을 결정하고, 엠마뉘엘은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한다. 영화는 조력사의 필요를 나름의 설득력으로 풀어냈다.
조력사는 존엄사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존엄사란 회생 가능성이 없을 때 억지로 연명치료를 이어가지 않는 소극적 안락사를 의미했는데, 최근 조력사란 개념이 정착하면서 이를 존엄사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존엄이란 판단력 있는 개인의 주체적인 의지 안에서 지킬 수 있는 것이라 믿는 사회에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실천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조력사야말로 ‘존엄한 죽음’에 가까워 보인다. 죽는 날까지 꼿꼿하리라 다짐하던 중년의 나에게도 “나답지 않게 사느니 죽겠다”는 식의 태도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2022년 칸에서 공개된 뒤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플랜 75’(2022)다. 프랑스의 거장들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말하는 동안, 일본의 젊은 감독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답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존엄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플랜 75’는 75살이 되면 국가가 조력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플랜 75’가 일상화된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에서 시작된다. 한 청년이 요양복지시설로 보이는 곳에서 총기를 난사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이 현장에 각주를 다는 듯 고령화 사회에서 점점 심각해지는 노인혐오 범죄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쩌면 ‘플랜 75’야말로 늙어가는 일본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전망이 화면을 휘감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 시퀀스의 끝에 카메라의 초점을, 본화면 뒤쪽으로 배치되어 있는 후방 레이어로 이동시킴으로써 비관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끝내 매혹되고 마는 비극에 맞춰진 집중을 흩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는 자리는 숙박업소에서 청소노동을 하는 78살 노동자 미치(바이쇼 지에코)의 일상이다. ‘플랜 75’는 그렇게 ‘고령화’라는 명판 위에 쌓아 올려져 있는 진부한 스펙터클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들숨과 날숨을 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우주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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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어려워지는 ‘존엄한 죽음’
영화는 구구절절 생각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보다는 간결한 언어로 모두를 위해 내일의 태양이 또 한번의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을 거는 편이다. 감독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는 건 그의 전작이자 영화의 모티프가 된 동명의 단편 ‘플랜 75’(2019)다. 여기서 조력사 상담을 받던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사는 건, 수치스러워.” 그는 말을 이어간다. “갈 곳이 없으니까, 이 제도가 너무 고맙지.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길바닥에서 죽을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다행이라는 듯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래도 이런 내가 마누라는 제대로 묻어줬다고.”
그러나 노인을 수치스럽게 만든 건 그 자신이 아니다. ‘플랜 75’를 권장하는 관료는 “고위층과 중산층은 돈을 쓰기 때문에 플랜 75의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타깃층은 저소득층 또는 몸이 불편한 분들, 즉 국가가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분들입니다.” 이 대사는 18분짜리 단편의 패기를 보여주는 듯 노골적이지만, 노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존엄을 운운하는 모든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한다. 우리 시대의 존엄이란 오로지 능력과 쓸모로만 증명된다. 그러나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자본과 국가의 변변하지 못한 언어 안에서 증명해야만 한다면, 그건 이미 존엄이 아니다.
‘플랜 75’를 보면서 나는 지금/여기의 존엄이란 그저 강퍅한 제도의 계획에 따라 흔들리는 허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존엄이란 독립적인 개인의 꼿꼿함에서 비롯되는 어떤 결기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취약한 개인들의 사연이 얽힌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관계 위에 싹트는 것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그 싹을 보살피고 키우기 위해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따뜻한 제도가 필요하다.
어쩌면 그래서 2024년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에서, 그리고 마찬가지의 경로를 걷고 있는 한국에서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국가의 자원을 누가 더 가져가면 누군가는 덜 먹게 되는 ‘파이’로밖에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력사는 찬성/반대로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하야카와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문제의식만큼이나 고다르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 고민 역시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력사의 정확한 표현은 ‘조력 자살’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자살은 그 사회의 삶의 조건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한국 같은 국가에서, ‘조력사’라는 주제는 여전히 ‘자살’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뤄져야 한다.
손희정 |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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