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내리는 은총인가‥대통령 사면권 남용 견제 방법은? [서초동M본부]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초 단행한 설 특별 사면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5일 박성재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윤대통령의 사면권 남용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은 "비위 공직자들을 풀어 주면 잊었던 것도 다시 생각이 나서 화가 난다"며 "어떤 국민들이 마음이 평화로워지냐. 비위 공직자와 권력자 둘이 화합하는 사면"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박 후보자는 "최소한의 기준은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여러 제도를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습니다. 사면권 논란은 처음이 아닙니다. 작년 광복절 특사 때도 똑같은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가장 먼저 대상자 선정의 기준이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면에도 법원이 '반헌법 범죄'라고 보고 중형을 선고한 죄질 나쁜 이들이 대거 포함됐습니다.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대표적입니다. 김 전 실장은 이명박 정부 국방장관 시절 군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해 8천8백여 차례 댓글 공작을 저지른 범죄로 징역 2년의 실형이 확정됐습니다. 당시 북한과 싸워야 할 군 요원들은 민간인을 가정해 댓글과 게시글을 썼습니다. 2012년 대선에도 개입했습니다. '우익 결집 보호', '중도 오염차단'을 내세워 친정부 여론 조성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원하는대로 여권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휘관은 대원들을 데리고 격려 회식을 가졌습니다.
법원은 엄중하게 판단했습니다. 1심은 "국민의 건전한 여론 조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은밀하게 개입한 행위로, 정당한 군사작전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2심은 "국민들의 의사표현과 토론은 대의민주주의 핵심적인 요소"라며 "군의 정치적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반헌법적 행위>"라고 질타했습니다. 즉, 헌법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의 기초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더구나 김 전 실장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 군 수사에까지 개입했습니다. 2013년 윤석열 검사는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사건을 수사했고, 이 과정에서 군의 댓글공작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김 전 실장은 국방부 조사본부에 '군이 대선에 개입한 것으로 결과가 나오면 안된다'고 지침을 내립니다. 조사본부는 이 지침에 따라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진술을 묵살하고 일선 간부의 '개인적 일탈'로 수사를 마쳤습니다. 법원은 "형사 사법의 기본 이념과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고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봤습니다.
김 전 실장은 "반헌법, 법치주의 위반"의 중대 범죄자라는 법원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형을 없애주고 복권해줘야 할 이유는 뭘까. 정부는 앞서 국정농단 사건 관련자들을 사면한 것과 형평을 맞추고 장기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온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통령의 결정 한번에, 4개 법원의 여러 재판관들이 5년여동안 증인 신문 등 치열한 변론을 거쳐 써내려간 판결문은 그대로 무의미한 일이 됐습니다.
지난달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징역 2년이 확정됐습니다. 김기춘 전 실장은 선고 직후 "(재)상고하겠다"고 밝혔는데, 막상 기한까지 상고장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교롭게도 엿새 만에 사면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공교로운 일은 또 있습니다. 김관진 전 실장 역시 지난 1일 댓글 사건 재판에 재상고 취하서를 제출했습니다. 자진해서 실형 2년 판결을 확정했고, 닷새 뒤 사면됐습니다. 사면은 형이 확정된 범죄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들은 사면 직전 자진해서 재판을 멈추고 형을 스스로 확정시킨 셈입니다.
이들 뿐만이 아닙니다. 김대열, 지영관 전 기무사 참모장은 지난 2014년 기무부대원들에게 서월호 유가족의 정치 성향이나 경제적 형편을 알아오라고 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작년 12월 2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이 선고돼,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지난달 31일 갑자기 상고를 취하하고 사면됐습니다. 마지막까지 다툴 뜻을 밝혔던 이들이 갑자기 수형 생활을 자청하고 나선 배경에 의문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관할 검찰청은 사면 발표가 나기 전까지 형 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정치인들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다 형이 확정되면, 사나흘 늦게 입소해 '황제 집행'이라고 비판 받았습니다. 이에 검찰은 지난 2015년, 실형 확정 즉시 당사자에 소환을 통보하고 응하지 않으며 강제 구인하기로 지침을 마련해 시행해왔습니다. 유독 이번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상고 포기 이후 [실형 확정 → 형집행 지연 → 설 특사 발표]의 황금 루트를 거치면서, 김기춘, 김관진 등은 단 하루도 수감되지 않았습니다. 중대 범죄를 저질러 수형 시설에서 교화돼야 한다고 본 사법부 판단은 또 무시됐습니다.
참여연대는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끝나기도 전에 사면을 놓고 미리 약속하거나 의견을 나누었다면, 이는 형사사법체계를 뿌리째 뒤흔들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발표 당일, 권순정 법무부 검찰국장은 사전 교감이 있었냐는 기자들 질문이 쏟아지자, "사면을 약속하는 경우는 없다", "사전 교감은 있을수가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진보 보수 정부 모두, 임기말 측근 사면은 늘 문제가 됐습니다. 그러나, 임기 초반부터 자기 진영 인사만 골라 사면하면서 갈등 해소와 국민 통합을 내새우는 건 어색합니다. 박광현 광주여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경제 활성화, 정치인 화해 및 국민 대통합이라는 명목으로 부당하게 사면을 남용하게 되면 오히려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학계에선 사면권은 신중하게 쓰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잦은 사면은 엄정한 법집행을 불가능하게 하고, 법을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기대를 갖게 하기(송기춘, "헌법상 사면권의 본질과 한계) 때문입니다. 사법 절차를 대통령 한 사람 판단으로 '백지화'하는 만큼, '초권력적 대통령제'의 특징(이상명, "사면권 행사의 헌법적 한계와 개선방안")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자칫 군주가 충성을 사기 위해 하사하는 사면, 즉 왕의 은총인 '은사권'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반헌법 범죄자'를 판결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쾌속 사면'하거나 '약속 사면'하는 게 너무 쉬운 현 제도는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외는 있지만, 미국은 보통 형을 살고 최소 5년이 지나야 사면 청원을 낼 수 있고 이 기준은 법무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됩니다. 일본은 형기의 1/3은 살아야 합니다. 프랑스는 전범(戰犯), 반인륜적 범죄, 테러 관련 범죄에 대해서는 사면을 배제합니다. 우리도 일각에선 "헌정 질서 파괴, 권력형 부정부패사범 등의 사면 자체를 금지"하는 사면배제조항을 법에 마련하자는 주장(김연진 성균관대 법학연구원)이 나옵니다.
[관련 기사] 이건희보다 빨랐던 김태우 사면‥사면권이란 무엇인가 https://imnews.imbc.com/news/2023/society/article/6518262_361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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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웅 기자(salto@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4/society/article/6572157_364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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