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졸업생, “(입틀막 사건으로) 인스타 스토리 난리 났다”
2월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한 카이스트 졸업생이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다가 경호원들에 의해 입을 틀어막히고 사지가 들려 끌려나갔다. 2월17일 오후 1시 카이스트 동문 10여 명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건에 대한 윤 대통령의 사과와 R&D 예산 복원을 촉구했다.
카이스트 물리학과 95학번인 황정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6호)은 “R&D 예산이 1991년 이후 처음으로 14.7% 삭감당했다. 현장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과제가 끊기거나 연구비를 50~80%씩 삭감당하고 있고, 그 여파가 가장 먼저 도착한 게 대학원생들이다. 막 박사를 졸업한 박사후연구원들의 신규채용도 막혔다. 학생들에게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기에, (대통령에게 항의한 졸업생의 목소리가) 결코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카이스트 화학과 04학번인 최성림씨는 “어제 대전 카이스트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두 번 일어났다. 안에서는 R&D 예산삭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졸업생을 이전에 강성희 진보당 의원 끄집어내듯이 똑같이 끄집어냈다. 같은 시각 밖에서는 카이스트 동문인 김선재 (진보당) 유성갑 예비후보가 교문 앞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동선 근처라는 이유로 폭력적으로 진압됐다.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선거운동에 공권력을 행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것은 명백한 과잉 심기 경호다”라고 말했다.
수리과학과 01학번으로 2004년 카이스트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김혜민씨(더불어민주당 광명을 예비후보)는 “저도 기억이 난다. 제 졸업식 때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부푼 마음을 안고 함께 졸업을 축하했다. 감히 이 졸업식에 R&D 예산을 삭감한 대통령이 와서 R&D 예산을 증액하겠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일삼았다. 10년 이상 과학 연구에 매진해온 귀한 과학의 미래들과, 이들을 인재로 키우느라 오랫동안 뒷바라지를 해온 학부모들이 주인공인 자리에서, 그 자리의 주인공인 졸업생을 입을 틀어막고 쫓아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과학 대통령이 아니라 가학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항의 서한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대통령실이 주말에 닫혀 있어 경찰에게 대신 전했다.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카이스트 힘내라”라고 응원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카이스트 13학번 졸업생 이아무개씨는 “어제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난리가 났다. 다들 너무 화내고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저도 지난해 석사 졸업식을 했다. 힘든 과정을 드디어 마쳤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앉아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사복 경찰이 끼어 있었다는 것부터가 너무 화가 났다.” 2월16일 졸업식에서 한 졸업생이 “R&D 예산 복원하라”고 외치자마자 졸업생 가운을 입고 앉아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해당 졸업생의 사지를 들고 밖으로 끌고나간 것을 비판한 것이다. 이씨는 “도서 예산을 깎고 도서전에 참석하고, 과학기술 예산을 깎고 카이스트 졸업식에 참석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불난 집에 구경하러 오는 건가? 다들 ‘너네는 예산 얼마나 깎였냐’가 인사말인 시절을 지나고 있는데,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대변인실은 “경호 안전 확보 및 행사장 질서 확립을 위해 소란 행위자를 분리 조치했다. 법과 규정, 경호원칙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조선일보〉에 “순수한 행사마저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졸업식에서 끌려나간 졸업생이 녹색정의당 대변인임을 두고 한 말이다.
이런 대통령실 입장에 대해서도 카이스트 졸업생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씨는 “정부가 먼저 갑자기 과학기술계에 카르텔이 있다면서 정치적으로 예산을 삭감하지 않았나. 여기에 당연히 정치적인 입장을 발언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앞서 발언한 황정아 책임연구원도 “그 졸업생이 녹색정의당이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졸업하려고 앉아 있던 학생 신분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R&D 예산을 복원하라는 게 무슨 당색을 가진 말도 아닌데, 그 한마디도 감수하지 못하고 끌어내야 한다는 게 황당하다”라고 말했다. 앞서 발언한 카이스트 04학번 화학과 최성림씨도 “녹색정의당 대변인이면 국민이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이 카이스트에 와서 학생들이 시위를 했을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정부가 국민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준 장면 같다”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카이스트 전산학과 09학번 한아무개씨는 “영상을 본 바 전혀 위협적인 행동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든, (학교 밖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김선재 예비후보든 피켓을 들고 한두마디 발언을 한 것뿐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역시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10학번 곽아무개씨는 “(당적을 떠나) 두 사람 다 카이스트 졸업생이고, R&D 예산 삭감이 과학기술계에 워낙 큰 이슈라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아예 소통하지 않고 끌고 나가서 당황스럽고 적반하장이라는 느낌이다. 지금이 연구과제 제안 기간인데, 수많은 대학원생들이 이전이라면 받을 수 있던 연구과제 예산도 삭감당하고 각종 정부·기업과의 프로젝트가 잘리고 있어 다들 매우 예민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삭감된 R&D 예산을 복원하고, 끌려나간 카이스트 졸업생과 카이스트 전체 구성원, 대한민국 과학기술계 종사자와 시민들에게 사과할 것을 윤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