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히 열린 비밀의 방…보물들의 단체사진 ‘찰칵’
‘수장고 산책: 아무튼, 동물!’ 기획전시
수장고 자체를 전시공간 활용
시공 초월한 ‘평범함’의 진면목
‘용 그림’ 연결 항아리 4개 눈길
새우·박쥐 등 열두띠 외 동물도
새해가 되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그해 띠와 관련된 소장품을 모아 소개하는 전시나 콘텐츠를 공개한다. 국립민속박물관도 해마다 열두 띠 전시를 연다. 올해는 서울 본관의 기획전과는 별개로, 파주관에서도 ‘수장고 산책: 아무튼, 동물!’(2월25일까지)이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수장고 8곳에 있는 유물 중 동물무늬가 들어간 소장품 150점을 선보인다. 수장고 산책이라는 제목답게, 입구에 놓인 브로슈어를 펼치면 수장고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나타난다.
‘수장고’(收藏庫)는 유물의 재질과 상태에 알맞은 안전한 환경을 갖추어 유물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보통 박물관에서는 수장고에서 유물을 보관하다가, 일부를 꺼내어 전시 공간에 진열한다. 박물관의 여러 공간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곳이 수장고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도 수장고에 출입할 권한을 가진 이들은 제한되어 있어, 마치 베일에 싸인 비공개 구역, 보물창고 같은 곳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열린 수장고, 또는 보이는 수장고라는 개념이 확대되고 있다. 온습도 등 유물 보존에 필요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수납된 모습을 관람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방식이다. 전시와 보관이 함께 이뤄지는 것이어서 ‘수장형 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온습도 변화, 빛이나 공기 노출에 민감한 금속이나 직물보다는, 도자기나 돌처럼 수더분한 재질의 유물들을 보관하는 공간에 주로 적용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실제 전시에 출품되는 수량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장형 전시는 더 많은 문화재를 관람객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부적 같은 동물무늬 카드·스티커
수장형 전시는 전시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칸칸이 채워진 격납장을 진열장으로 활용하기에 일반 전시에 비해 제약이 크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스토리텔링과 관람객 참여 활동으로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 눈에 띈다. 전시 해설이 진행되는 시간이 아니어도, 동물별로 꾸민 미니 도록 속 이야기를 따라 직접 대표 전시품이 놓인 수장고를 찾아가 볼 수 있다. 관람객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도록 동물무늬 카드와 스티커를 비치해 둔 것도 새해 부적을 얻어가는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주어진 공간을 재치 있게 활용해 시각적인 효과를 높인 연출들도 재미를 더한다. 격납장 두 칸에 걸쳐 비슷한 모양의 용무늬 철화백자 항아리 4점을 나란히 배치한 것이 그 예이다. 부리부리한 눈,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과 갈기, 눈앞의 여의주를 움켜잡으려는 날카로운 발톱. 우리에게 익숙한 용의 모습은 여러 동물의 장점을 합친 상상의 결과다. 그런데 전란의 영향으로 장인들이 흩어지고, 고급 재료를 조달하기도 어려웠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용무늬 백자에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용 항아리는 본디 왕실에서 쓰던 귀한 물건이지만, 이때의 것들은 푸른색을 내는 수입 물감인 청화 대신 갈색 철화를 사용하고 마치 눈앞에서 1초 만에 휙 스쳐 간 용의 모습을 서둘러 복기한 것처럼 구름 사이의 몸통을 쓱쓱 그려냈다. 항아리 한 점만 놓고 보면 이게 무슨 용인가 할 성싶지만, 한 점이 아닌 여러 점의 항아리들을 가지런하게 모아 놓으니 새로운 모습이 나타난다. 이 불완전한 무늬가 나란히 이어져 아주 크고 긴 용 한 마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위엄이 넘치는 용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궁중 화원의 솜씨로 정교하게 그린 청화백자 속 용과는 또 다른 생생함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날 다른 이들이 만들고 그렸을 용들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을 해낸 한 시대의 풍경을 관람객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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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 바깥의 전체 풍경
수장고 지도를 따라 가볍게 거닐다 보면 용과 호랑이, 봉황, 나비, 새와 물고기 등의 동물들을 두루 만날 수 있다. 동물이라는 폭넓은 주제로 묶인 유물들은 만들어진 시기도, 모양도, 만듦새도 각양각색이다. 왕실용 비녀나 청화백자처럼 완성도가 뛰어난 것들도 있지만, 일반 전시에선 만나보기 힘들었을 평범한 유물들도 있다. 소의 모양을 한 제기인 ‘희준’(犧尊)은 술을 담는 몸통 아래 달린 투박한 발이 서로 균형이 맞지 않아 기우뚱하게 서 있다. 높이 멀리 뛰어오르는 습성에 착안해 학업의 성취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개구리와 잉어 연적 역시 영민하다기보다는 어리숙하고 귀엽게 보인다.
전시실이 아닌 수장고에서 유물을 보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보통의 전시가 유물을 한점 한점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기회라면, 수장고 전시는 반대로 한발 뒤로 물러나서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모여 있는 전체를 바라보게 한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독사진과 단체 사진이 다른 느낌과 의미를 주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특별하지 않고 아주 훌륭하지 않은, 그러나 각자 그대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평범함이다. 이런 평범한 물건들이 떠올리게 하는 숱한 시대의 숱한 삶들이 오늘날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민속(民俗)이라는 말의 진면목일지 모른다.
아무튼이란 말은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이라는 뜻이다. 내치고 배제하는 게 아닌, 작은 차이들까지 감싸 한 품에 담쏙 끌어안는 ‘아무튼’. 이 표현이 들어간 전시는 올해의 주인공인 용뿐만 아니라 옛사람들의 삶에 깃들었던 다양한 동물들로 이야기의 품을 넓혀둔다.
토끼띠 해엔 토끼처럼 빠르게 뛰어다니고, 용띠 해엔 용처럼 높이 솟아올라야 하는 우리의 새해. 하지만 조상들은 새우나 박쥐처럼 열두 띠에 들어가지 않는 동물에서도 좋은 뜻을 찾아 귀한 상징으로 삼았다. 이 전시에 소개된 다양한 개성과 장점을 지닌 동물들처럼 말이다. 온전한 평범함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그런 귀한 마음들이야말로 불확실한 한 해를 또 살아낼 우리가 수장고 사이를 산책하며 얻어가야 할 가장 따뜻한 응원일지 모르겠다.
신지은│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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