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을 것은 단 하나, ‘진심’이라는 작지만 뜨거운 불씨

한겨레 2024. 2. 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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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끝내 믿어야 할 것
특수절도 17살 “25살 형 지시”
법정증언 번복에도 모두 유죄
위증·교사 수사 나서자 자백
검사 “진심 전달된 것 같아”
게티이미지뱅크

인생에 대해 가장 자신만만한 나이는 언제일까. 인생이 자신이 아는 법칙 안에서 돌아간다는 확신은 점점 강해지는 것일까, 그 반대일까. 의심과 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래도 한발 내딛게 하는 어떤 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열일곱 찬우(이하 모든 이름은 가명)는 금은방을 털었다. 망치로 금은방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진열되어 있는 금붙이들을 들고 튀는 수법을 썼다. 금은방에는 보통 시시티브이(CCTV)와 경보장치가 모두 설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범행에는 무엇보다 스피드가 생명이다. 경보가 울리고 경찰이나 방호직원이 출동하기 전에 재빨리 범행을 끝내고 튀어야 한다. 시시티브이에 범행 장면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감수할 정도의 대담함도 필요하다. 대담함과 날렵함 면에서 17살은 꽤나 적당한 나이라 할 수도 있겠다.

증언 번복에 초임검사는 식은땀

그러나 찬우의 범행은 금방 발각되었다. 대담함과 날렵함은 있었으나 경험과 노련함은 없었던 탓이다. 아니 애초에 발각될 것이 예정된 범죄였다. 경찰에 검거된 찬우는 모든 범행은 ‘기욱이 형’이 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는데요, 형이 시켜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기욱은 스물다섯이다. 덩치가 크고 문신도 좀 있다. 나름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데 직업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누가 물으면 아버지 하는 일을 돕는다고 하거나 그럭저럭 둘러댄다. 겨우 20대 중반이지만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기욱의 범죄 경력은 조회서의 여러 장을 채우며 넘어간다. 기욱은 찬우와 같은 10대 후배들에게 ‘생활하는 형’으로 알려져 있다.

찬우에게 금은방 털이를 지시했다는 혐의에 대해 기욱은 펄쩍 뛰며 부인했다. 망치를 구해주고 유리창 깨는 법을 알려줬다는 진술도, 돈 되는 귀금속은 안쪽 진열대에 있으니 거기를 먼저 공략해야 한다고 알려줬다는 진술도 모두 다 찬우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겁을 먹고 못하겠다고 하는 찬우를 윽박질러 금은방으로 가게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범행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다가 범행을 마친 찬우를 만난 일에 대해서는 우연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기욱은 특수절도교사죄로 기소되었다. 이미 다른 범죄로 구속 중에 있는데 추가 건이 뜨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찬우 자식이 증인으로 나와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말만 해주면 나는 무죄가 되는 거야. 경찰에서는 왜 다르게 말했냐고 하면? 그건 뭐 대충 둘러대라고 해. 어쩔 거야 검사도 어차피 증거 없어!’

어린 나이부터 교도소 주변을 들락거렸던 기욱은 나름 이 바닥이 빤하다고 생각했다. 교도소 안에는 경험적으로 체득한 법률 지식과 재판 전략으로 무장한 반(半) 판사, 반 변호사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의 조언도 다르지 않았다. 이건 말만 잘 맞추면 되는 게임이었다. 기욱은 교도소에서도 부지런히 작전을 짜고 접견 오는 지인들에게 지시했다. “찬우를 찾아 위증하도록 하라.” 기욱의 친구들이 날린 디엠(DM)이 찬우에게 날아들었다.

고 검사는 서른둘이다. 검사가 된 지 몇달 지나지 않은 초임 검사다. 고 검사는 검사가 되기를 꿈꾸며 공부하던 시절, 검사가 되어 법정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그려보곤 했다. 빳빳하게 날이 선 법복처럼 날렵하게 정리된 증거들을 제출하는 검사, 때맞추어 등장해 “저 사람이 범인이 맞아요” 증언하는 증인,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낙담하는 피고인, 정의를 위해 준엄한 목소리로 최종 논고를 하는 검사. 그러나 현실의 법정에서 고 검사는 증인으로 나와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고등어 뒤집듯 180도 뒤집어버린 17살 금은방 절도범을 신문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경찰에서는 그냥 누가 시켰다고 하면 덜 벌받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요, 사실 기욱이 형이 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혼자 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술술 뱉어대는 찬우의 어깨 너머로 기욱이 검사를 향해 조롱 섞인 눈빛을 쏘며 실실 웃고 있다. 오늘따라 제시할 반대 증거가 빨리 찾아지지 않고 고 검사의 법복 안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법대 위에서 경험이 오랜 판사가 젊은 검사의 고군분투를 조금은 애처롭게, 조금은 심드렁하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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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믿지 않는 부장검사, 멈칫한 순간

결론은 몇주 뒤, 판사의 판결에 의해 다소 맥없이 났다.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합리적 이유 없이 번복한 찬우의 진술은 신빙할 수 없다.”

간단한 거짓말로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겠다는 기욱과 찬우의 당찬 작전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들이 발 딛고 선 땅에서 그들이 아는 방식으로 그들이 확신했던 일들은 생각만큼 호락호락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찬우와 기욱은 위증범과 위증교사범으로 고 검사의 수사를 받게 되었다. 고 검사가 압수해 온 자료들 중에는 위증하라는 지시를 전달받은 찬우가 기욱에게 보낸 답신이 있었다.

“형님, 저는 어떻게든 형님을 빼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형님 나오시면 형님 따라 잘 생활해보겠습니다.”

인생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범위 안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맹랑하고도 천진한 충성맹세였다.

위증범들에 대한 조사를 마친 고 검사가 부장실에 들어온다.

“부장님, 위증 피의자들 조사 마쳤는데요, 모두 자백했습니다.”

숨을 토하듯 보고하는 고 검사의 얼굴이 약간의 흥분으로 들떠 있다.

“절대로 자백 안 할 것 같다더니, 어떻게 자백을 했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요, 나이도 젊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거냐고 설득을 했습니다. 피의자들이 울면서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겠다고 합니다.”

정 부장은 마흔일곱이다. 20대부터 시작해 마흔을 넘겨서까지 범죄와 그를 둘러싼 갖은 군상을 보아온 탓에, 눈앞에 보이는 무언가를 덥석 믿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나 어떤 뉘우침이나 반성, 그로부터 이어지는 인생의 변화 같은 것에 대해 정 부장은 어느 정도 회의적인 편이다. 이 바닥에서 인간의 뉘우침은 자주 가장되니까. 설사 그 순간 진실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변수와 복잡한 세상의 질서 앞에 인간의 한순간 뉘우침이란 종종 나약한 것이니까. 습관처럼 미간을 잔뜩 좁히고 보고를 듣던 정 부장은 그러나 고 검사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에 잠시 멈칫했다.

“제 진심이 조금은 전달된 것 같아서 좋습니다.”

첫번째 위증 수사를 마친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고 검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고는 민망했는지 서둘러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며칠 동안 이어진 야근으로 얼굴빛이 꺼칠했다.

‘진심이 전해졌다고 믿는 순간의 감각’. 그 작지만 뜨거운 불씨가 젊은 검사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것이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듯했다. 정 부장은 오래전에 잊었던 옛 친구의 이름을 떠올릴 때처럼 잠시 고요했다.

‘그래 어쨌든 끝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저런 것이겠지.’

찬우와 기욱과 고 검사의 어떤 시간을 통과한 위증사건 기록에 반듯하게 도장을 찍으며, 어쨌든 오늘은 그 젊은이들이 나누었을 진심에 대해 다만 믿어볼 일이라고 정 부장은 생각했다.

정명원│대구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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