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만점’ 연구자들과 ‘어딘가 이상한’ 소설가, 남극의 부름을 받다
남극에 첫발
푼타아레나스서 연구대원 합류
나흘 이동길 비로소 만난 길벗
“일꾼 필요하다” 식생 임무 제안
2시간 비행 끝 아스팔트길 착륙
지금 읽는 ‘남극일기’에서 로버트 팰컨 스콧은 바람에 새파랗게 깎인 요철 구간을 헤쳐 나가는 중이다. 대체로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서 내일은 나으리라는 낙관으로 끝난다. 시대를 지우면 스콧의 기록은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남극은 여전히 아름답고 경이롭고 두려운 곳이다. 스콧은 절친한 친구인 제임스 매슈(J. M.) 배리에게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미래를 위해 계획했던 소박한 즐거움들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한다. 스콧이 사용한 ‘소박한’이라는 말에서 그가 끝까지 그리워한 것들의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편지의 수신자인 배리는 우리가 잘 아는 피터 팬 시리즈의 작가로, 그는 스콧의 일기를 정리해 출판함으로써 친구의 마지막을 기렸다.
모두 잠든 가운데 혼자 불을 켜놓고 있으니 친절한 승무원이 “아 유 오케이?” 하며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다. “따뜻한 물 좀 부탁해.” “오렌지주스 달라고?” 내 영어 발음이 그 정도라니. 하지만 곧 뜻이 통했고 미소와 함께 컵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왜 나는 잠들지 못하는 걸까, 설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워서? 구조대가 텐트를 발견했을 때, 스콧은 일기와 편지를 오른팔에 끼고 있었다. 눈에 띄는 곳에 두어야 발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결과보다 과정이 더 가치 있다고 적었다. 남극의 초기 과학 연구는 스콧 탐험대의 기록물에 빚지고 있다. 동상으로 손발을 잃어가는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지질과 생물 연구에 필요한 획득물을 버리지 않았다. 그 무게는 15㎏에 달했다. 이제 비행기는 지도의 가장자리를 밀며 남미 대륙으로 들어왔다. 칠레의 산티아고까지는 4281㎞가 남았는데 놀랍게도 거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하지만 28시간의 비행 끝에 땅은 좀 밟아볼 수 있을 듯하다. 아, 나 정말 괜찮은가?
남극행의 관문, 푼타아레나스
산티아고에서 1박을 하고 1월29일 푼타아레나스에 내리니 계절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겨울에 한국을 떠난 나는 33도의 산티아고를 잠깐 경험한 후 초겨울로 돌아와 있었다. 산티아고 공항에서는 입국장만 나가도 “택시 필요해?”를 외치는 기사들이 많았지만 여기는 차가 없었다. 우버를 부르니 결제 수단을 변경하라는 알림과 함께 거절이 떴다. 신용카드가 잘못됐나 싶어 다른 카드로 바꿔봤지만 소용없었다. 현금 결제로 바꾸니 그제야 차가 잡혔고 내릴 때는 약간의 팁을 제하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 “푼타아레나스는 아름다운 도시야.” “정말 그런 것 같네.”
차창 밖 도시는 고요하고 차분한 잿빛이었다. 여름이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생장의 여름과는 다른, 잠시 추위에서 놓여난 풍경. 누군가는 척박한 도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도로를 달리는 사이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성장한 인천과 근원적으로 유사했다. 바다는 철광처럼 무거운 남빛이고 화물차들이 자주 오갔으며 마젤란해협의 세찬 바람이 불었다. 화물선들은 부두를 바라보며 떠 있었고 그 시선을 오래된 창고들이 받아냈다. 호텔에 도착하니 체크인 카운터는 이미 만원이었다. 남극 마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호텔에 가득했다.
겨우 짐을 풀고 식사를 하러 나가자 밤색 개 한마리가 따라왔다. 푼타아레나스의 개들은 대체로 크고, 자유롭게 거리를 다닌다. 풀어 키우는 녀석들도 있고 야생 개들도 있다고 한다. 부두 창고 벽에는 푼타아레나스 사람들과 동물들의 일상이 다감하게 그려져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꼬리를 휘저으며 아이들을 참견하는 개, 나무 담장의 턱시도 고양이, 두툼한 털의 양. 그런가 하면 항만에 버려진 고래 흰 뼈가 그려져, 포경 기지로 유명했던 이 도시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오래전 죽은 고래의 흔적과 사라진 활황의 기세. 19세기 중반 작살을 든 많은 유럽인이 증기선을 타고 이곳으로 왔고, 1961년 남극조약이 발효되기까지 남극해에서 180만마리의 고래가 사라졌다. 180만마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는 살상의 숫자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남극해의 고래를 그런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고기와 가죽과 기름을 얻기 위한 획득물에서 보호하고 존중해야 하는 생명체로 바라보게 된 변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작살과 총을 놓고 생명에 대한 경이와 사랑을 택한 과정은 인간종이 이루는 이런 마음의 변화가 진보와 발전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공원으로 걸어 들어가니 침엽수들이 높이 서 있었고 남극풍을 따라 가지와 잎이 비틀려 자라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런 나무들은 바람의 현현이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아라우카리아의 대형목들도 함께 서 있었다. 어색할 정도로 둥글게 전정한 나무들이 보일 때면, 사다리를 놓고 바람의 시간을 조금씩 가지치기했을 정원사들을 상상했다.
알앤디 예산 삭감의 여파가 여기까지
1월30일, 나흘을 홀로 이동한 끝에 드디어 일행들과 만났다. 비슷한 일정으로 한국에서 출발한 ‘하계연구대원’들이었다. 나를 빼고는 모두 과학자였다. 호텔에서 식당으로 걸으며 나는 긴장한 나머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전화 통화를 제외하고는 처음 만난 사이인데, 보자마자 방금 끝난 아시안컵 16강 경기 결과부터 전했다. 눈이 커다랗고 ‘고막 남친’ 같은 중저음의 엘(L) 박사는 “작가님, 그동안 말 나눌 상대가 없어서 많이 답답하셨나 봐요” 하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는 대체로 혼자 여행하는 편이었다. 책 한권을 내고 나면 언제나 한국어가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떠나서 머물렀다.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이국을 걷고 있으면 고독과 고립 사이 마음이 재조정되면서 다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극행은 그럴 수 없는 여정이었다. 일단 2인 1조가 아니면 기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니까.
북극곰처럼 선하고 따뜻한 인상의 엠(M) 박사는 나처럼 혈당과 혈압을 조심해야 하는 과학자였다. 나중에 대화해보니 그 역시 나처럼 낯을 가리는 편이라 만나자마자 자신의 건강 정보부터 나열해버리고 만 것 같았다. 유관기관에서 파견된 벡터씨는 개인 드론까지 마련해온 열혈 공학자였고 나와는 여름 훈련에서 만난 사이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번화가를 돌아다녔지만 마침 유람선이 들어와 맛집들은 이미 만석이었다. 할 수 없이 손님이 아무도 없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보자마자 직원과 주방장이 흠칫 놀라 앞치마를 찾아 매는 아주 로컬한 분위기였다. 그건 시간 때문이기도 했다. 밤 9시 반쯤 해가 지는 푼타아레나스에서는 오후 5시에 간단한 요기를 한 뒤 8시 이후에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피자 한판과 칠레 고기 요리를 모둠으로 맛볼 수 있는 플레이트를 주문했다.
원래는 더 많은 일행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되면서 방문을 계획했던 연구원들이 오지 못했다. 내 일정 또한 그에 따라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엘 박사는 내게 같은 식생팀이 되어달라고 했다.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에, 낯선 곳에서 겉돌 나를 배려해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기지 생활에 발붙일 공간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후에 나는 엘 박사에게 원래 과학자들은 이렇게 워커홀릭이냐고 물었고 나중에는 아예 “제발 좀 쉬세요!” 하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뭐든 시켜만 주세요, 저 역시 식물을 좋아하는 식집사입니다!” 하고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우리 집 사랑스러운 화분들에 대해 얘기했지만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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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무사 착륙
“저희는 집에서는 절대 식물을 안 길러요.”
엠 박사는 미소를 잃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게 잘라 말했다. 아, 이건 마치 소설가가 쓰는 일에 너무 지친 나머지 일상을 위해서는 한줄의 일기도 쓸 수 없는 상황과 같은 건가 싶었다.
“사실 저희는 식물을 좀 괴롭게 하는 편이죠.”
실험을 하다 보면 극한 환경에 식물을 노출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과학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 역시 소설가가 쓰다가 쓰다가 등장인물을 교통사고로 제거해버리는 마음과 같겠구나 싶었다. 엠 박사는 연구 기간 거의 1만포기의 시금치를 초록별로 보내야 했고 그래서 지금도 시금치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기초학문 연구자들이 독특해요. 개성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 많죠. 그러니까 남극까지 오는 것이고요.”
엘 박사가 부연 설명을 했다. 나는 걱정 말라는 투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하고 답했다. 나 역시 남극행을 꿈꿔온 이상한 개성의 소유자 중 하나이니까.
이틀을 푼타아레나스에서 보내고 2월1일 오전 10시40분, 드디어 남극행 비행기를 탔다. 그 흔하다는 일정 지연이 없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비행기는 활주로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아스팔트 길에 우당탕탕 착륙해 우리를 내려주었다. 어쨌든 남극에 무사히 왔으므로 각 나라 탑승객 모두 안도의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공항(그곳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운영은 극지 전문 민항사인 답(DAP)이 담당하고 있었다. 남극(킹조지섬 프레이 기지)에 내리자마자 긴 사슴의 몸통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라 눈이 녹으면서 드러난 암석과 자갈들로 아름다운 암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영구동토층이 흰무늬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완전한 행복감에 빠졌다. 단순하고 명징한 감정이었다. 공항버스에 실려 거의 출렁다리급의 진동을 느끼며 부두로 향할 때에도, 지급받은 주황색 구명복을 찬 바람 부는 맥스웰만에서 갈아입으면서도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하게 부풀어 올랐다. 월동 대원들이 조디악(모터를 단 고무보트를 통상적으로 부르는 말)을 몰고 와 남극 물개처럼 생긴 유빙에 묶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바람에 떠내려가지 말라고 조디악을 고정해 놓은 것이었다. 얼음이 말뚝을 대신하는 곳, 바로 여기가 남극이었다.
김금희│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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